건강하고 맛 좋은 음식은 내일을 바라보는 자세에서 비롯합니다

A   PERSONA   42

마켓레이지헤븐 대표, 안리안

Jul 10, 2025

안리안은 도시와 농촌, 문화와 유통을 가로지르는 식문화 기획자다. 한남동에서의 살롱 운영과 패션 업계 경험을 바탕으로 전북 고창에 정착해, 10년째 유통 플랫폼을 운영하고 있다. 그는 건강하고 바람직한 먹을거리는 결국 좋은 관계에서 온다는 철학 아래, 생산자와 소비자를 신뢰로 잇고, 유통을 하나의 태도로 바라보며 감각과 책임으로 설계한다.

직접 내온 차의 향이 은은하네요.

요즘 차에 푹 빠져 있어요. 올해 수확한 세작인데, 저 포함 세 명이 장장 네 시간 넘게 따도 고작 30g 두 봉지 정도가 나오더라고요. 무척 귀하죠? 올해는 차를 직접 덖었어요. 입암에 계신 김동성 선생님 작업실에서요. 야생차를 키우고 직접 덖는 분인데요, 재작년부터 만남을 이어가고 있어요. 오랜만에 설레는 마음으로 생산자와 만나고 있답니다.

어떤 점에서 설레는 걸까요?

김동성 선생님은 비건 생활을 하며 자급자족으로 농사짓고 야생차를 길러요. 다원에 갈 때마다 좋은 차를 아낌없이 나눠주는데, 그 마음이 순수하게 전해졌어요. 어느 날은 다원에 가기 전날 밤에 문자가 왔어요. "향 나는 걸로 씻지 말고, 머리도 감지 말고, 향수도 뿌리지 말라"고요. 도대체 왜 그런가 싶었는데, 다음날 설명하더라고요. 찻잎이 워낙 향을 잘 흡착해서 미세한 향이나 불순물이 들어갈 수 있다고요. 본인도 차를 따거나 덖는 날엔 이른 새벽에 정수 물로만 샤워하고 밭에 나온대요. 이런 태도를 가진 분을 만난 게 오랜만이에요. 운영한 지 10년 되어가는 마켓레이지헤븐 Market Lazy Heaven(이하 마레헤)의 방향성을 생각하게 되었죠.

마레헤의 시작점에도 그런 만남이 있었나요?

그렇죠. 저희가 왜 고창에 왔는지에 대한 이야기와도 연결되는데요. 30대까지 이태원에 오래 살았는데, 문득 도시에서의 삶이 지속가능한지를 고민하다가 귀촌을 결심하게 됐어요. 당시 고창에서 만난 세 명의 농부들이 있어요. 만나면 뭐 하나라도 손에 쥐어 돌려보내고 싶어 하면서도 일에는 타협이 없었죠. 그들만큼 울림을 주는 생산자를 찾기란 어려워요. 제 운명은 늘 누군가를 우연히 만나, 돕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생기고, 예상치 못한 도움을 주면서 인생이 드라마틱하게 바뀌더라고요.(웃음) 20대엔 ‘40대가 되면 쌓은 궤적들을 모아 농업 분야에서 쓸 수 있으면 좋겠다’라고 막연히 생각만 했는데, 그 만남들이 저를 새로운 세계로 끌어들인 것 같아요.

결국 사람이네요. 고창에서의 삶은 어떤가요?

내일 당장 어디로든 떠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지역이나 소속에 고정된 정체성을 두지 않으려 합니다. 뿌리를 내렸다고 느끼진 않아요. 다만 제가 지역을 고를 때 중요하게 본 기준은 세 가지였어요. 전통이 살아 있는가, 자연이 잘 보존됐는가, 농업이 발달했는가. 어릴 적 고창에서 살았기에 오히려 이곳을 피하고 싶었지만, 여러 지역을 다녀보고 나니 고창만큼 균형이 잡힌 곳이 드물더라고요. 산과 바다가 있고, 농업·수산업·임업까지 공존하니까요.

“정말 중요한 원칙과 기준은 눈에 잘 안 보이는 데에 있어요. ‘내일’을 바라 보니까 당장의 인정이나 과거의 성공에 머무르지 않으려 해요. 마레헤는 열매를 수확하는 사람들이 아니에요. 고집스럽게 묵묵히 파종하는 일에 더 가깝죠.”

마레헤를 시작하기 전 패션 프로듀서로 일했다고 들었어요. 이태원에서 꽤 긴 시간 동안 동명의 카페 겸 바를 운영했다고요.

맞아요. 패션 업계에서도, 남편이자 공동창업자 유상진 대표와 에이전시 ‘언더스탠드’를 운영할 때도, 이태원에서 ‘레이지 헤븐’이라는 살롱 공간을 운영할 때도 ‘넌 도대체 뭐 하는 사람이야?’라며 주변에서 항상 물어왔어요. 기획부터 스케줄 관리, 홍보까지 뭐든 다 하는 저를 뭐라고 규정하기가 어려웠어요. 누군가와 얘기를 나누면 본능적으로 사람 사이를 연결하고, 매끄럽게 일을 조직해내는 감각은 늘 제 안에 있었어요.

기민하고 섬세한 감각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요?

경청과 관찰이요. 타인의 이야기를 듣고 관찰하다 보면 그 사람이 안고 있는 틈과 빈자리가 보여요. 전에 설립한 에이전시 ‘언더스탠드’에는 늘 ‘listen(듣다), observe(관찰하다), create(만들다)’라는 세 단어를 꼭 붙였어요. 제가 가장 잘하는 일이 귀 기울여 듣고, 연결하고, 일이 되게 하는 것 같다는 지인의 말에서 힌트를 얻었죠. 마레헤도 마찬가지예요. 농부들과 이야기하다 보니 문제 지점이 보였고, 함께 고민하다 오프라인 장터 ‘마켓 레이지헤븐 고창’을 연 것이 마레헤의 시작이었죠. 늘 그렇듯 저는 잘 듣고 관찰하고, 연결했을 뿐이에요.

그래서일까요. 마레헤의 큐레이션에선 고유한 진정성이 느껴져요. 늘 자기 자신의 이야기로부터 출발하는 듯 합니다.

맞아요. 경청과 관찰은 제 자신과 남편의 마음을 듣는 일도 당연히 포함돼요. “요즘 내가 좋아하는 건 뭐지?” 혹은 “무엇을 먹고 마실 때 행복하던가?”처럼요. 마레헤가 소개한 첫 단품 품목이 토마토예요. 제가 토마토를 엄청 좋아하거든요.(웃음) 어린 시절, 한약방을 하셨던 할아버지가 아침마다 토마토를 따서 제 코앞에 들이밀던 기억이 생생해요. 저만의 내밀한 추억에서 출발해, 품질 좋은 유기농 완숙 토마토를 찾아서 소개했지요.

한 때 국산 들깨로 만든 떡은 하루에 3천 상자가 팔릴 정도로 품절 대란을 일으킨 적도 있었다고요?

‘떡을 좋아하는 건 왜 고루한 걸까?’ 라는 개인적 의문에서 출발했어요. 젊은 감각으로 해석할 방법을 고민하다가 들깨 절편과 가래떡이라는 품목을 찾아냈어요. 요구르트 위 토핑이나 샐러드와 함께 먹는 브런치 메뉴 등 평소 즐기는 레시피와 팁을 소개했는데 소위 ‘대박’이 났고, 반응이 꾸준하게 좋았죠. 깊이 파고들고, 일상으로 녹여내는 감각은 익숙한 흐름이 된 것 같아요. 그렇게 쌓인 시간과 경험이 마레헤를 만들었고요.

마레헤는 단순한 직거래 유통 플랫폼이 아닌, 어떤 태도와도 같이 느껴집니다. 이를 정의할 수 있는 단어가 있을까요?

‘내일’이요. 오늘보다 한발 앞서 의제를 던지고, 좋은 식재료를 고르고 제안하는 일을 하니까요. 계절을 먼저 읽고, 새로운 방식을 모색하려고 해요. 패키징의 경우는 환경을 고민하다 보니 무지 박스를 이용하는 등 최소화했고요. 정말 중요한 원칙과 기준은 눈에 잘 안 보이는 데에 있어요. ‘내일’을 바라보니까 당장의 인정이나 과거의 성공에 머무르지 않으려 해요. 마레헤는 열매를 수확하는 사람들이 아니에요. 고집스럽게 묵묵히 파종하는 일에 더 가깝죠. 일종의 운동(movement)처럼 느껴지기도 하고요. 외롭기도 하지만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원래 내일은 손에 닿을 듯 닿지 않으니까요.

그럼에도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이유는요?

유기농업에서 중요한 과제가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의 관계 회복이에요. “유통업자는 사기꾼”이라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것이 아닐 정도로 오랫동안 속고 또 속여왔어요. 저는 중재자이자 가교로 역할 하는 거죠. 서로를 오해하지 않도록, 좋은 생산자와 소비자가 연결될 수 있게 돕는 거예요. 마레헤를 시작하고 삶은 피곤해져도, 묵묵히 제자리를 지키는 생산자들을 떠올리면 다시 마음이 정리돼요. 변화는 느릴 수 있어도 분명 조금씩 좋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믿어요.

흔들리지 않기 위해 지켜온 원칙이 있다면 소개해주세요.

상식선을 지키는 일, 그리고 책임지는 자세요. 요즘은 농부의 농법도 중요하지만, 약속을 지키는지가 더 중요하게 느껴져요. 저희 역시 상품 하나, 과정 하나 허투루 넘기지 않지요. 품질에 자신있고, 검수도 여전히 회사 내부에서 직접 해요.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상품은 판매하지 않고, 필요한 곳에 기부합니다. 합리적인 가격선도 계속 살피고, 물량 안정화나 소비자 편의를 위해 보이지 않는 고민도 계속하고 있고요. 프리미엄보다 신뢰 기반의 마켓이 되기 위해, 저희가 세운 기준은 반드시 지킵니다.

에디터 최선우
포토그래퍼 맹민화


Recommended

A PERSPECTIVE is a digital content platform developed througha partnership between Magazine B and Polesta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