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에게서 순간을 마주하는
태도를 배웁니다

A   PERSONA   58

플로리스트·보타라보 대표, 정희연

Dec 11, 2025

정희연은 유수 브랜드 공간의 식물 작업을 맡아온 플로럴 스튜디오 보타라보의 대표다. 줄기와 잎, 꽃잎까지 식물의 모든 부분을 조형 요소로 삼는 그의 작업에는 동양의 선과 서양의 볼륨이 공존한다. 매일 꽃이 피고 지는 순간을 마주하는 그는 식물만큼 순간의 아름다움을 온전히 보여주는 존재는 없다고 말한다. 20년 동안 꽃의 모든 표정을 지켜본 정희연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꽃을 피우는 식물처럼 모두에게 다정한 사람이 되고자 매일 마음을 다잡는다.

한 해를 50일 정도 남기고 있는 지금이 1년 중 가장 바쁜 기간이라고요.

크리스마스와 새해 같은 큰 행사를 앞두고 있다 보니 공간을 꾸미고 선물을 준비하느라 바빠요. 일이 복잡한 건 결코 아닙니다. 새벽녘 꽃 시장에 들러 필요한 식물을 사고, 스튜디오에서 정리한 뒤 작업을 시작하죠. 틈틈이 샘플을 만들고 전화나 메일, 미팅 같은 크고 작은 커뮤니케이션을 합니다.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모든 일을 혼자 하다 보니 11월 중순부터 12월 초까지는 늘 분주하게 지나갑니다.

요즘은 레스토랑, 전시장 등 다양한 장소에서 식물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식물을 찾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식물이 가진 특유의 생기가 공간을 한층 더 풍성하게 만들거든요. 인테리어나 가구만으로도 충분히 단정하고 아름다운 공간을 만들 수 있지만, 식물이 더해지면 분위기의 깊이가 확연히 달라지죠. 한 번 식물이 있는 공간을 경험하고 나면, 그 생기가 사라졌을 때의 공백이 더 크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식물을 공간에 전시하지 않은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하고 끝낸 사람은 없는 이유죠.(웃음)

브랜드와 작업할 때는 주로 어떤 방식으로 식물을 연출하나요?

다양합니다. 컬렉션이나 프레젠테이션처럼 큰 규모의 행사에서는 테마에 맞춰 꽃과 식물을 연출합니다. 브랜드에서 주제와 어울리는 색상이나 선호 품종을 지정하면, 그에 맞춰 식물을 고르고 꽃을 디자인해 공간을 꾸미죠. 배치할 때는 어떻게 해야 식물이 잘 보일지를 고민합니다. 사람마다 얼굴 선이 살아나는 각도가 있듯, 꽃에도 특히 아름답게 보이는 면이 있거든요. 흔히 ‘꽃의 얼굴’이라고 하는데, 위치에 따라 얼굴의 방향과 각도가 달라지므로 처음부터 식물이 놓일 지점을 꼼꼼히 살펴봅니다. 최근에는 브랜드에서 아티스트나 앰배서더를 후원하는 사례도 많아져 선물용 꽃도 자주 제작해요. 브랜드와의 협업은 아니지만, TWL(Things We Love)에서 운영하는 전시 공간 ‘핸들위드케어 Handle With Care’에서 전시 꽃 디스플레이도 맡고 있습니다. 2019년 공간이 문을 열 때부터 함께했으니 올해로 6년이 되었네요. 식물의 비중이 크진 않지만, 작품을 돋보이게 한다는 목표가 뚜렷하고 플로리스트의 자율도가 높아서 늘 즐겁게 작업합니다.

“사람과 마찬가지로 꽃 역시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순간이 아름다운 존재예요. 그러니 수명이 다할 때까지 그 변화의 모습을 온전히 지켜봐주면 좋겠어요.”

플로리스트의 작업이 특별하게 다가오는 건 살아있는 식물을 다루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기반으로 작업할 때 생기는 고유한 방법이나 감각이 있을까요?

행사는 일회성이 강해서 그 순간을 가장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해요. 그래서 아직 덜 핀 것보다는 ‘지금이 가장 예쁘다’ 싶은 꽃을 우선으로 사용하죠. 문제는 환경과 품종에 따라 만개 시기가 조금씩 다르다는 점이에요. 그래서 작업 전에 행사장의 온도와 습도를 살펴보고, 미리 꽃을 피워보며 적절한 타이밍을 잡는 샘플링 과정을 거칩니다. 타이밍이 잡히면 그에 맞춰 식물을 들여오고 작업을 시작하죠. 때로는 덜 핀 꽃, 적당히 핀 꽃, 완전히 핀 꽃을 나눠 들여와 함께 배치하기도 해요. 서로 다른 상태와 컬러, 질감의 식물을 적절히 섞어 풍경을 다채롭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플로리스트의 역량이라고 생각합니다.

생명이 있는 꽃을 다루다 보면 어려움도 있겠죠?

꽃집에서 꽃을 판매할 수 있는 기간은 보통 3일 정도예요. 그 이후엔 대부분 폐기해야 하죠. 처음엔 그게 참 아까웠는데요, 작업을 하다 보니 최고의 결과물을 위해서는 꽃이 가장 아름다운 순간에 사용하는 게 맞다는 걸 깨달았어요. 물론, 만개한 꽃을 사용하는 게 불편한 사람도 있어요. 몽우리가 단단한 꽃을 신선하다고 생각하던 시절도 있었죠. 하지만 플로리스트에게 피지 않은 꽃은, 단지 ‘자신의 아름다움을 아직 발휘하지 못한 꽃’일 뿐이에요.

식물이 시들고 사라지는 순간을 어떤 마음으로 받아들이나요?

대부분 꽃이 활짝 폈을 때가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지만, 꼭 그렇지 않아요. 어떤 꽃은 오히려 마지막 순간에 진가를 드러내기도 하죠. 튤립이 그래요. 물에 꽂아두면 조금씩 키가 자라며 만개하고, 수명이 다할 즈음 꽃잎이 뒤로 크게 젖혀지면서 흐드러지는데 그 모습이 꼭 춤을 추는 것처럼 보여요. 그 유려한 곡선이 알바 알토 Alvar Aalto가 디자인한 이딸라 Iittala의 투명 화병과도 정말 잘 어울리고요. 하지만 그 순간을 본 사람들은 많지 않아요. 보통은 잎이 처지고 뒤집히면 시든 줄 알고 금방 버리거든요. 사람과 마찬가지로 꽃 역시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순간이 아름다운 존재예요. 그러니 수명이 다할 때까지 그 변화의 모습을 온전히 지켜봐주면 좋겠어요.

처음과 지금, 일을 대하는 마음가짐에는 어떤 변화가 있나요?

처음 일을 시작하면 누구나 '일을 많이 하는 방법'을 고민하지 않을까요?(웃음) 저 역시 스튜디오를 열었을 당시에는 프로젝트가 적었어요. 한가한 시간이 많아 매일 친구들과 작업실에서 와인을 마시며 미래에 대해 얘기했죠. 여러 프로젝트로 바쁜 나날을 보내는 요즘에는 '다시 함께 일하고 싶은 사람’이 되는 게 중요하다고 느껴요. 같은 말이라도 단어와 어조에 따라 전달되는 온도가 다르잖아요. 그 한마디에 따라 상대방의 태도가 달라지는 걸 알기에 프로젝트가 순조롭지 못할 때일 수록 더 다정해지려 합니다. 사소한 표현이라도 친절이 담겨 있다면, 안 되는 일도 함께 해보려는 의지가 생기죠. 저 역시 그런 경험이 있기에 친절하고 다정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합니다.

일에서 벗어날 때에는 어떻게 시간을 보내나요?

전시를 봐요. 전시에서 마주한 색이나 질감이 꽃을 연출할 때 좋은 영감이 되거든요. 평소 관심이 없던 주제의 전시라도 어떻게 공간을 조성했는지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워 방문하기도 해요. 예를 들어 서울 용산의 아모레퍼시픽미술관에서 열린 <조선민화전>은 전체 조도를 낮추고 작품에만 조명을 집중해 관람객이 그림에 몰입하도록 연출했어요. 반면 8월부터 진행한 <Mark Bradford: Keep Walking> 전시는 초입부를 환하게 밝히고, 바닥에 설치한 캔버스·천·종이·노끈을 찢어 만든 수백 개의 띠들을 직접 보고 체험하도록 구성했죠. 같은 공간이라도 전시 주제에 따라 표정이 완전히 달라지는 점이 늘 흥미롭게 다가옵니다.

꽃이 아닌 무언가로 세상과 연결된다면 어떤 일을 택했을 것 같나요?

요리를 했을 거예요. 실제로 꽃과 요리의 갈림길에서 진로를 고민했습니다. 셰프가 되려던 것은 아니었고요.(웃음) 플로리스트와 푸드 스타일리스트의 존재가 잡지를 통해 알려지기 시작할 즈음이었는데, 식물과 음식으로 아름다운 결과물을 완성하는 작업이 참 멋지게 느껴졌거든요. 아버지의 조언에 따라 꽃을 택했지만, 요리에 대한 동경은 늘 마음 한편에 남아있어요. 한동안은 낮엔 꽃을 만지고, 저녁엔 집에서 요리하며 시간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재료를 다듬고 반죽을 하다 보면 잡생각 없이 온전히 그 순간에 집중할 수 있어 참 좋아했죠. 예전만큼 자주 하지는 못하지만, 좋아하는 사람과 맛있는 음식에 와인을 곁들이는 시간은 여전히 일상에 큰 즐거움입니다.

에디터 정신오
포토그래퍼 박순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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