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하듯 일상을 감각합니다

A   PERSONA   17

디자이너·TRVR 대표, 정승민

Dec 5, 2024

2010년 시작한 라이프스타일 브랜드 TRVR의 대표이자 디자이너 정승민은 매 순간을 섬세하게 감각하는 사람이다. 그렇기 위해선 일상을 여행처럼 특별하게 바라보는 태도가 필요하다. 

인생의 변곡점을 꼽아본다면요?

이십대 무렵 자전거를 타면서 그와 관련된 멋있는 문화를 알게 된 순간이겠죠. 멋있는 문화 속엔 멋있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그들이 하는 일련의 창의적인 활동들을 보며 ‘나도 무언가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끊임없이 했어요. 첫 시작은 사이클 캡이었어요. 영국으로 유학을 다녀온 친구가 모자를 하나 선물해줬는데 서양인 두상에 맞춰진 형태라 썩 어울리지 않는 거예요. 제가 산업 디자인을 전공했는데 선물받은 모자를 분해해 새롭게 패턴을 떠서 만들었어요. 샘플만 50개를 만들었죠. 야심 차게 홈페이지도 만들어 판매를 시작했는데 하나도 안 팔렸어요. (웃음) 하지만 TRVR의 시초와도 같은 제품이라 의미가 크죠.

회사생활을 한지 2년만에 개인 브랜드 TRVR을 열었습니다.

업무량이 많지 않아서 굉장히 편한 회사였는데 ‘이렇게 계속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했어요. 한동안 회사생활과 TRVR 운영을 병행했죠. TRVR의 브랜드 입지 분석이나 방향성, 이상향 같은 것도 없이 순수하게 내 것을 쌓고 싶다는 마음만 컸어요. 디자인을 전공했고 그것 밖에 몰랐거든요. 되돌아보면 전체적인 그림을 보지 못한 채 ‘나의 순수함이 통할 것’이라 여겼던 것 같아요.

결국 그 순수함이 통했고 14년이 흘렀어요. TRVR의 빛나는 순간도 여러 번 맞이했죠.

2012년 논현동에서 이곳 경리단길로 옮긴 게 컸어요. 동네마다 지닌 에너지가 다르잖아요. 이곳의 좋은 에너지를 받아 앞치마를 만들었는데 그게 히트를 쳤죠. 3년 사이 제품 생산부터 물류, 판매, 마케팅까지 아울러 배우는 시간이었어요.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을 아울러 브랜딩으로 정의할 수 있었죠. TRVR을 운영하며 얻은 노하우를 근간으로 브랜딩 회사 베이컨트웍스 VACANTWORKS를 열어 함께 운영했어요. 2013년, 2014년만 하더라도 회사 내부에 브랜딩팀을 두지 않고 외부에 의뢰하는 경우가 많았거든요. 덕분에 정말 많은 일들을 할 수 있었죠. 브랜딩 프로젝트는 직접 회사를 운영하는 것에 비해 호흡이 짧으니까요. 새로운 산업에 속한 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에너지를 얻을 수 있었어요. 커피 관련 회사의 브랜딩 작업을 하며 자연스럽게 카페 TRVR도 운영하게 되었고요.

대표님이 정의하는 브랜딩은 무엇인가요?

초기에는 클라이언트에게 ‘멋있는 결과물을 만들어주는 일’이라고도 생각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브랜딩이 만드는 일이 아닌, 정리하는 일이라는 걸 깨달았어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클라이언트의 개념이나 생각들을 정리해주는 일’인 거죠. 아이디어, 방향성을 비롯한 모든 답은 클라이언트가 이미 가지고 있어요. 수많은 가능성 속에서 가장 유효한 것을 찾아 걷어내고, 또 걷어내는 작업을 통해 클라이언트가 원하는 결과값을 찾아주는 일이 브랜딩이라고 생각해요.

“낯선 곳에서 이국적인 경험을 쌓을 수도 있지만, 내가 바라보는 것들을 조금만 달리하면 일상도 충분히 여행으로 만들 수 있어요. 그러한 일상이 쌓이면 굉장히 다양한 기억, 감각이 남아 시간의 밀도가 높아지겠죠”

이제는 베이컨트웍스를 내려놓고 TRVR에 집중하고 있어요. 업력이 길어지고 회사 규모가 성장하며 책임감도 달라졌나요? 

이전과 달리 대량 생산을 통해 매출을 올려 숫자를 만들어야 해요. 제품의 소재, 생산 시스템, 디자인, 커뮤니케이션 방법 모든 게 필연적으로 바뀌어야 하죠. 그러면서 여러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TRVR이 만드는 제품 하나에 관여된 사람이 정말 많다는 점을 늘 상기해요. 제품을 생산하는 해외 공장 직원들을 넘어 그들의 가족까지 수백 명이 연결되어 있죠. 유해한 소재로 제품을 만들 경우, 수많은 사람의 삶이 피폐해질 수 있기에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고 있어요.

TRVR 초기부터 가죽이나 캐시미어 같이 천연 소재를 민감하게 선택해왔어요. 다만 TRVR이 선보이는 제품군은 종잡을 수 없었죠. (웃음)

TRVR은 트래블러 Traveler의 줄임말로 물리적인 공간의 이동을 넘어 미래로의 여행에 대해 고민하고 지은 이름이에요. 미래로 나아가는 여행에 꾸준히 함께하는 제품을 만들고 싶었거든요. 종잡을 수 없는 게 맞아요. 어찌 보면 저의 성장 과정을 고스란히 담고 있거든요. 자전거에서 출발했지만 차를 타게 되고 으레 삶의 영역이 넓어지니까 다양한 제품들을 만들어왔죠. 다만 그 속에서 오늘도, 내일도 있는 제품을 만들려면 아주 오래 전부터 사람과 함께해온 소재를 사용해야 했어요. 양질의 캐시미어 목도리를 만들기 위해 몽골 유목민을 찾아가기도 했고, 일본 오카야마 지방에서만 구할 수 있는 최고급 셀비지로 청바지를 만들기도 했어요. 2020년까지는 제품 하나를 만드는데 2년 가량이 소요된 것 같아요. 이후로 접어들면서는 출시 2년 전부터 상품을 미리 개발하는 시스템을 취하고 있죠.

브랜드 파운더이자 디자이너로서 제품, 공간 디자인, 사진 등 경계 없이 전방위적인 작업을 이어왔어요. 제네럴한 스페셜리스트라고도 느껴지는데,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일하는 것의 장점은 무엇이던가요?

디테일을 챙기면서도 전체를 보는 눈을 가질 수 있다는 점이겠죠. 많은 직업인이 제네럴리스트, 스페셜리스트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하는 때를 마주하리라 봐요. 근데 이 두가지가 깔끔하게 양분되지는 않는 듯 합니다. 그래서 늘 저는 이상적인 디자이너, 기획자를 T자형 인간이라 생각해요. 깊이 파온 본인의 코어를 가지고 있되 주변으로 넓게 아우르는 사람이죠. 브랜드를 운영하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전체를 봐야만 해요. 이탈리안 레스토랑을 개업하는데 분식집 인테리어를 하고 중식 메뉴를 개발할 순 없잖아요. 모든 요소가 유기적으로 움직이는지 늘 기민하게 봐야하죠.

일하는 사람 정승민의 모토는 무엇인가요?

‘Life Needs Travel’. TRVR의 슬로건이에요. 제 삶과도 일맥상통해요. 이번주 월요일에 점심으로 무얼 드셨는지 기억하시나요? 거의 대부분 기억 못할 거예요. 하지만 신혼여행 첫날 점심에 무얼 먹었는지는 또렷하게 기억나요. 특별하니까요. 뇌과학에 근거하면 우리 뇌는 매일 같이 일어나는 일들은 지워버리고자 노력한대요. 여행은 우리 삶을 특별하게 만들어요. 낯선 곳에서 이국적인 경험을 쌓을 수도 있지만, 내가 바라보는 것들을 조금만 달리하면 일상도 충분히 여행으로 만들 수 있어요. 그러한 일상이 쌓이면 굉장히 다양한 기억, 감각이 남아 시간의 밀도가 높아지겠죠. 같은 일을 하더라도 다른 결과물을 낼 수밖에 없을 테고요.

대표님에게 영감이 되는 것은 무엇인가요?

주위 사람들과 영감을 주제로 굉장히 자주 이야기하곤 해요. 영감은 굉장히 치열하게 찾아내고 또 곱씹고 곱씹어야만 완성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럴 때 온전히 나만의 통찰력, 인사이트로 체득될 수 있고 결과물로도 만들어질 수 있죠. 상황을 얼마나 섬세하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 같아요. 요즘 횡단보도를 보면 바닥에 신호등이 설치된 곳들이 있더라고요. 핸드폰을 보느라 바닥으로 시선이 향한 사람들을 보고 누군가가 떠올린 영감이겠죠. 정보가 너무나 많은 세상이에요. 정보와 지식을 혼용하는 실수를 범하는 상황, 사람을 자주 마주하는데요, 이걸 구분하는 것 또한 섬세하게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라 봐요. 그리고 저는 새로운 세대에 거는 기대가 있어요. 인간은 본능적으로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려는 의지를 갖고 있고 그로 인해 발전된 삶을 살 것이라고 저는 믿어요. 저희 뒤를 잇는 세대가 섬세한 식견으로 새로운 것들을 만들어내리라 확신해요.

에디터 유승현
포토그래퍼 박순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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