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넓은 논의를 촉발하는
힘을 예술에 담아냅니다

A   PERSONA   8

미디어 아티스트·카이스트 공과대학 산업디자인과 교수 겸 XD LAB 디렉터, 강이연

Oct 3, 2024

강이연은 글로벌 예술 신에서 굵직한 설치 작품들을 선보이며 아시아 출신 여성 아티스트라는 한계를 뛰어넘는 미디어 아티스트다. 삶의 대부분을 작업과 연구에 몰두하는 그는 본질을 꿰뚫는 통찰력을 바탕으로 예술과 기술, 경험이 교차하는 뉴미디어 작품을 통해 관객들을 완전한 몰입 상태로 빠져들게 한다.

지난해 미국 나사・구글 아트&컬처와 협력한 작품을 공개하며 더욱 주목받고 있는데요, 아티스트로서도 굉장한 경험이었다고요?

나사 NASA와 구글 Google이라니. 저도 처음엔 놀랍고 신기했어요. 이들과 함께한 1년의 작업 기간은 제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동시에 고통스러웠고요. (웃음) <패시지 오브 워터 Passage of Water>는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에서 열린 제28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8 Dubai) 기간에 공개한 작품이에요. 담수 자원의 중요성과 기후변화로 인한 담수 위기를 전달하고자 나사의 과학자들, 구글 아트&컬처 팀과 긴밀하게 협력했죠. 복잡하고 어려운 데이터를 시각화하는 작업은 마치 번역가가 된 것 같았어요. 물방울이 팽창하고 수축하는 디지털 풍경을 만들고 지구의 물 패턴 변화와 기후 변화와의 관계, 나사의 복잡한 수문학 데이터를 시각화하는 작업, 담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잠재적 해결책을 비디오 게임으로 만드는 등 디지털 기술과 웹, 데이터 시각화, 게임 엔진, 사운드와 같은 다양한 요소를 복합적으로 사용해 작품을 완성했습니다.

간결하고 직관적인 정보를 담은 예술 작품이라고 생각했는데, 지난한 과정을 거쳐 얻은 결과물이라는 것이 놀랍네요.

저는 극단적인 계획형 인간이에요. 구조적이고 논리적으로 생각을 정리해 시트를 짜고 문서화하는 것을 좋아하죠. 모든 작업에 앞서 집요하게 리서치하는 스타일이고요. 구글에서 원했던 건 나사의 데이터를 읽을 줄 알고, 리서치를 통해 해석하고 창조적으로 풀어낼 수 있는 아티스트였어요. 제가 이분법적 분야에 관심이 많고, 지속 가능성에 중점을 둔 작업을 해왔다는 것을 알고 협업을 제안한 거죠. UN의 기후변화와 물 부족 관련 자료부터, 나사가 보내주는 엄청난 용량의 데이터들, 과학적 이해를 돕기 위해 봐야 할 논문도 수십 편이다 보니 카이스트 동료 교수님들께 도움을 요청한 일도 많았어요. 그럼에도 저와는 전혀 다른 분야의 사람들과 치열하게 서로를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피드백을 주고받는 과정이 너무 재미있었습니다. 과학자들은 더욱 창의적으로, 작가인 저는 보다 분석적으로 임하는 시간이었죠.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한 중요한 과정이 있다면요?

작품 주제를 해석하기 위해 활용하는 중요한 수단은 논문이죠. 관심 분야나 궁금한 것이 생기면 논문부터 찾아봐요. 한 편의 논문 내용은 짧지만 저자의 말에 공감하고 깊이 이해하려면 그와 관련된 논문 100편쯤은 읽어야 해요. 많은 정보를 담고 있는, 호흡이 긴 글이 재미있어요. 요즘 같은 세상에 굉장히 공들여 팩트 체크를 한다는 점도 좋고요. 읽고 또 읽기를 반복하고 자문하며 작품화할 수 있는 키워드를 도출해요. 끝까지 파야 만족하는 성격이다 보니 저의 작업 방식을 얘기할 때 ‘난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고 말하기도 하죠. (웃음)

‘프로젝션 맵핑’은 아직 대중에게 낯선 분야입니다.

장르보단 하나의 매체라고 볼 수 있어요. 진보한 기술의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를 적극 활용하는 동시에 영상과 사운드, 여러 장치를 융복합해 3차원 공간에 덧입히는 작업이죠. 굉장히 새로운 것 같지만 미디어 고고학(Media archaeology)적으로 보면 1960~1970년대에도 필름으로 성당과 자동차 등을 맵핑 mapping해왔어요. 넓게 보면 비디오 아트에 근간을 두고 있고, 더 멀리 본다면 유럽에서 18세기 후반부터 인기를 끈 일종의 원시적 빔 프로젝터라고 불리는 판타즈마고리아 phantasmagoria 역시 기술과 장비의 차이일 뿐, 프로젝션 맵핑 projection mapping과 같은 맥락이죠. 인류는 늘 환상을 만드는 일을 좇았어요. 시대마다 가능한 기술을 사용해 사람들이 몰입할 수 있는 일종의 쇼를 선보였죠.

“작가라면 결과물에 떳떳해야 해요. 스스로를 속이는 일이 가장 어렵잖아요.”

어릴적부터 화가를 꿈꿨고, 서울대학교 회화과에서 서양화를 전공했습니다. 이후 뉴미디어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화가 말고는 다른 꿈을 가져본 적 없을 정도로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고, 정말 잘했어요. 당연히 미대에 가야겠다고 생각해 서울대 서양화과에 입학했죠. 그림을 그릴수록 기술적으로 잘 그리는 것과 작가가 되는 것은 다른 길이라는 걸 깨닫게 되더라고요. 가장 큰 문제는 그림을 통해 하고 싶은 얘기가 없다는 거였어요. 캔버스가 갑갑하게 느껴졌고 내가 그린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는데 계속 쌓여가는 걸 보며 우울한 시기를 보냈죠. 전공을 바꿀지 고민하던 찰나에 비디오 아트를 접했는데, 이거구나 싶었죠. 사진을 찍고 편집해 영상을 만들며, 이전에 없던 시간이라는 개념이 생긴 거예요. 책상 위 컴퓨터 한 대만 있으면 작업이 가능해 일종의 해방감이 느껴졌고 장치와 공간을 활용해 시공간을 확장할 수 있다는 점도 흥미로웠죠. 그제야 하고 싶은 얘기들이 많아졌어요.

삶에 중요한 영향을 준 멘토가 있나요?

미국 미디어 아티스트 중 제니퍼 스타인캠프 Jennifer Steinkamp라는 정말 유명한 분이 있어요. 예술의 영역에서 3D 애니메이션을 사용한 개척자로 손꼽히죠. 미국 UCLA에서 공부할 때 제게 프로젝션 맵핑을 가르쳐 준 분이기도 하고요. 이분 덕분에 기술과 감각뿐 아니라 작가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작업의 의미 같은 부분도 알게 됐어요. 지금도 가끔 이메일을 주고받는 가장 기억에 남는 저의 선생님이죠.

요즘 가장 집중하고 있는 일은 무엇인가요?

10월 중순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이하 DDP)에서 열리는 ‘서울디자인 2024’에서 신작을 선보여요. 인공지능(이하 AI)이라는 거대한 키워드를 중심으로 인류와 AI는 함께 진화할 수 있을까? 인류와 공진화할 미래의 AI 아키텍처는 어떤 모습일까?라는 질문에서 출발한 대형 설치물입니다. 2022년 챗GPT 3세대가 등장하며 AI 기술이 급성장하는 상황에서 어떤 이야기를 하면 좋을지 고민이 많았어요. 기술 발달의 메커니즘이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게 되며 두려움 또한 커지고 있는 현실을 작품화하고자 준비 기간만 1년 이상을 쏟았죠. 이번 작품은 지금의 현실을 이해하고, 미래의 AI 아키텍처를 상상해 보려는 시도예요.

아티스트이자 연구가, 교육자이기도 한데요, 각각의 작업을 어떤 경계로 나누나요?

제가 하는 모든 것이 일이죠. 그래도 늘 재미있다고 느끼는 건 작업입니다. 풀타임 아티스트로 작업에만 몰두하는 것이 꿈이죠. 본질적으로 저란 사람은 ‘메이크 Make’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내가 만든 것을 전시할 수 있는 지금의 삶에 만족해요. 카이스트 교수직은 100% 일이에요. 수업 외에도 행정 업무가 정말 많아서 힘에 부치고 포기하고 싶은 날도 있죠. 그래도 성실한 학생들과 함께 연구하고, 랩을 운영하는 일이 즐거워요. 저의 연구에 진심으로 도움을 주시는 교수님들이 곁에 계셔서 든든하고요. 작가는 굉장히 자기중심적인 직업이잖아요. 어떤 방식으로든 사회에 기여하는 사람이 되고 싶은데, 가르치는 행위가 그 역할을 한다고 생각해요. 카이스트 내에서 제 수업이 꽤 인기가 높아서 작년엔 상도 받았어요. (웃음)

이 많은 일을 소화하면서 언제 휴식의 시간을 갖나요?

요즘 저의 최대 고민이에요. 주말도 없이 하루 14시간 이상 일을 하다 보니 이제 정말 한계가 온 것 같아요. 취미를 가져보려고도 했지만 가장 즐겁게 몰입할 수 있는 게 작업이다 보니, 워라밸 없는 삶은 스스로 선택한 것 같아요. 혼자만의 시간이 반드시 필요한 사람이라 일을 안 할 땐 가만히 누워있어요. 아무 생각 없는 상태를 만들기 위해 책도 읽지 않고, 넷플릭스도 잘 보지 않죠. 저에게 온전한 휴식은 누워서 강아지 유튜브를 보는 시간이예요. (웃음)

예술가에게도 성패라는 것이 존재할까요?

성패를 나누는 객관적 지표들이 있겠죠. 유명 기관과 전시하거나, 대형 프로젝트를 진행하거나, 어워즈에서 수상하면 주변에서 성공했다고 인정해 주는 것처럼요. 하지만 그건 좀 단편적인 것 같아요. 제 기준에서 만족스럽지 않으면 남들이 아무리 칭찬해 줘도 별로인 거죠. 작가라면 결과물에 떳떳해야 해요. 스스로를 속이는 일이 가장 어렵잖아요. 미심쩍은 부분을 외면하기 위해 마음이 불편하고 불안해지는 게 싫어요. 호흡이 긴 영상을 만들다 보면 어딘가 비는 구석이 생길 때가 있어요. 억지로 메우려다 보면, 불필요하게 끼를 부리게 되죠. 그런 것들을 피하려고 해요.

예술의 역할은 뭘까요? 예술이 우리 삶에 변화를 줄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예술이 세상을 바꿀 순 없더라도, 변화를 위한 화두를 던질 수 있다고 믿어요. 최근 진행한 프로젝트만 보더라도 담수 위기, 인류세 등과 같이 인류가 직면한 문제를 예술로 직관적이고 쉽게 알릴 수 있다는 점을 실감하고 있어요. 우연히 마주친 공공예술을 통해 누군가는 행복감을 얻을 수도 있고, 꼭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지 않더라도 아름다움은 삶을 풍요롭게 해주잖아요. 새롭고 흥미로운 경험이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죠.

에디터 이은경
포토그래퍼 박순애


Recommended

A PERSPECTIVE is a digital content platform developed througha partnership between Magazine B and Polesta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