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으로 파헤치는 작업에 즐거움을 느끼며 연기합니다

A   PERSONA   50

배우, 김신록

Oct 16, 2025

김신록은 무대와 매체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자신만의 존재 방식을 끊임없이 탐구하는 배우다. 연극 무대에서 시작해 드라마와 OTT, 스크린까지 활동 영역을 넓혀온 그는, 몸과 움직임으로 연기를 사유한다. 언어를 넘어서는 연극의 본질을 몸으로 돌파하려는 신념은 그의 모든 작업의 축이 된다. 대본을 곱씹고 매 순간을 빚어내는 과정에서, 김신록은 매번 새로운 자신과 넓은 세계를 마주한다. 2004년 첫 연극 무대 이후 이어진 궤적은 단순한 재현을 넘어, 부딪히고 깨지며 가닿고 쌓여왔다. 김신록은 언제나 몸과 움직임이라는 가장 본질적 언어로 근원을 탐색하는 작업자다.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나요? 연극 <프리마 파시> 공연이 한창이죠.

‘프리마 파시 Prima Facie’는 법과 정의, 여성의 목소리를 다루는 강렬한 작품이에요. 한 명의 배우가 모든 이야기를 이끌어가야 하는 1인극이라서 홀로 무대 위에 서게 돼요. 그만큼 제 안에 있는 감각과 경험을 최대한 끌어올려야 하죠. 공식 준비 기간은 두 달 남짓이었어요. 연습기간부터 지금까지 술을 끊고, 체력 관리에 신경을 쓰고 있어요. 사실 이런 적이 별로 없는데 긴장되면서도 집중력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요.

전에도 1인극 경험은 많았는데, 이번 작품은 어떤 점이 달랐나요?

맞아요. 2010년 무대에 올린 연극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도 1인극이었는데, 서술자 캐릭터가 따로 있었어요. 배우 자신이 그대로 무대에 노출되는 방식이었죠. 반면 ‘프리마 파시’는 모든 순간이 ‘테사’라는 주인공의 1인칭 시점으로 진행됩니다. 관객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식보다는 직접 체험하는 방식에 가까워요. 그래서 제 몸이 작품의 세계와 부딪히고 반응하는 방식을 섬세하고 밀도 있게 탐구해야 하죠.

홀로 극을 파워풀하게 이끌어가는 120분 내내, 무용 공연만큼이나 신체성이 돋보인다는 호평이 이어지던데요.

이번 연극의 제 무대가 움직임이 많고 큰 편이에요. 흥미로운 점은 테사 역을 맡은 세 배우가 보여주는 무대가 제각기 다르다는 건데요. 배우가 품은 공연과 연기에 대한 이해와 접근 방식을 엿볼 수 있죠. 이자람 배우는 판소리, 차지연 배우는 뮤지컬, 저는 연극으로 배경이 상이해요. 연극은 언어를 넘어 ‘몸’으로 격파해야만 도달할 수 있는 세계를 열어젖혀 보여주는 장르라고 믿습니다. 연극이 다른 매체와 구분되는 가치도 바로 그 곳에 있다고 생각하죠. 몸으로 수행하는 ‘움직임’을 중시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어요. 공연장에서 관객과 배우가 만나기 때문에만 느낄 수 있는 열기, 채취, 살과 피부, 정동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연극은 언어를 넘어 ‘몸’으로 격파해야만 도달할 수 있는 세계를 열어젖혀 보여주는 장르라고 믿습니다. 연극이 다른 매체와 구분되는 가치도 바로 그 곳에 있다고 생각하죠.”

2020년 매체에 데뷔한 이후로 무대와 영상, 스크린까지 다양한 영역을 바삐 오가고 있잖아요. 매체 별로 차이가 있다면요? 

드라마나 영화는 시간적 여유가 그리 많지 않아요. 대본이 완결되지 않은 채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바뀌는 경우도 있어요. 순간의 집중력과 변화에 적응하는 순발력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반면에 연극은 긴 시간을 두고서 하나의 텍스트를 곱씹고 반복할 수 있어요. 연습 시간에 문학 작품과 같은 희곡 작품을 몸으로 파헤쳐요. 첫 공연이 끝나면 ‘아, 알았다!’ 하고 깨닫는 순간이 오는데요. 가장 큰 기쁨으로 다가옵니다. 공연을 거듭할수록 새로운 것들을 발견하며 앎을 채집하는 쾌감은 엄청나요.

다종다양한 장르와 매체를 오가며 동시에 여러 작업을 하는 것이 부담스럽지 않나요?

조승우 선배님의 ‘햄릿’을 보고 큰 감명을 받았어요. 배우가 뮤지컬, 드라마, 영화에서 쌓아온 무기를 자유롭게 꺼내 쓰는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어요. 저 역시도 연극에서 탐구한 다종다양한 움직임의 메커니즘들을 매체 연기에 적용하고, 그 반대로도 마찬가지죠. 잘 봐주신다면 기뻐요.(웃음) 결국 모든 경험은 제 무기가 되는 셈이에요. 여러 매체를 거치며 벼려온 무기를 언제든 꺼낼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 커요.

그렇다면 몸과 움직임이 김신록 배우만의 무기겠네요.

무대 위에 선 내 몸이 지금 이 순간,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묻습니다. 연기는 결국 배우의 몸을 통해 삶을 보여주는 일이니까요. 연기하는 인물을 고정적으로 재현하기보다, 순간과 상황마다 달라지는 주체를 매번 새로이 만나고 빚어내는 일에 가깝죠. 인간은 항상 변하고 입체적이잖아요. 몸을 통한 사유가 일어나고 인생까지도 돌아보게 된다니까요. 작품을 선택할 때 고려하는 점과도 맞닿아 있어요.

작품 선택 기준을 조금만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해준다면요.

작품을 통해 인간과 세계의 관계라는 질문에 닿을 수 있을지를 가장 중요하게 봅니다. 작품이 저도 몰랐던 세계를 제안하거나 깊은 사유를 끌어낸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뻐요. 단순히 ‘현상’을 드러내는 텍스트보다는 그 ‘원인’을 끝까지 더듬는 작품을 선택하려고 해요. ‘프리마 파시’의 텍스트 역시 2019년 미투 운동 당시에 힘 있는 메시지를 던졌겠지만, 6년이 지난 지금에는 극의 강렬한 서사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느꼈어요. 정의를 누구도 독점할 수 없는 이 시대에, 무대가 언어의 이분법을 넘어 관객의 감각에 가닿지 못한다면 자칫 교조적으로 보일 수 있다고 걱정했고요. 이렇게 좋은 텍스트를 만나면 배우로서 살과 피, 열기를 쏟아낼 수 있을지를 고민하게 됩니다.

연기에 대한 철학을 평소에도 연구와 실험을 통해 발전시켜 왔어요. 어떤 작업들이었나요?

꽤 오랜 시간 동안 무대 안팎에서 꾸준히 작업의 주제와 방식을 해명하고 이해시켜왔어요. 강의도 하고 글도 쓰고요. 워크숍을 열거나, 공연에 적용한 여러 방법론(method)을 또 다시 작은 공연 형태로 공유하는 ‘워크 데모스트레이션 ’이라는 방식도 제안했어요. 제가 감각한 세계를 작품으로 옮기는 탐색의 전 과정을 세세하게 분석하고 나누는 일 또한 중요한 작업이거든요. 오래전부터 연극을 같이 해온 동료와 선배들이 <프리마 파시>를 보고 “그동안 신록이가 해왔던 어렵고 복잡하고 이상한 작업들이 공연에 집대성된 것 같다”라고 말하더라고요. ‘창작은 어디서 시작하고 끝나는가’라는 질문을 부단히 품고 탐구를 멈추지 않은 덕분입니다.

연기는 결국 나를 둘러싼 세계를 넓고 깊게 보며 이해하는 일이네요. 연기 외 다른 영역에서도 영감을 얻는 편인가요?

그럼요. 다른 장르의 예술 작품을 만나면 지평이 확 열리는 기분이에요.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의 그림은 구상과 추상 사이의 움직임을 탐구하는 데 큰 영감을 주었고, 최근 d/p갤러리에서 본 최상아 작가의 전시 <Slit: 그림의 눈>은 이번 극을 이끌어가는 데에 큰 자극과 도움이 되었습니다. 좋은 책에서 적확한 언어를 발견할 때의 짜릿함도 큽니다. 충격(spark)과 확장은 저를 움직이도록 하죠. 공연도 더 자주 보고, 움직이며 열어두려 합니다. 요새는 소소한 깨달음, 기쁜 앎, 순수하고 강렬한 감정을 느끼게 하는 순간을 만나면 글을 마구 써내려가요. 글이 저를 어디로 데려가는지, 흐름에 맡기고 따라가 보고 싶어요.

일하지 않을 땐 어떻게 쉬나요?

연기를 할 때면 강렬(intense)하게 몰입하므로 일상에선 단순하고 사실적인 일을 해요. 수건을 개거나 간단한 반찬을 만들어요. 요리하는 걸 좋아해요. 공연이 끝난 뒤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 부엌에 서곤 하죠. 냉장고 속 식재료가 낭비되고 방치되어 썩는 걸 못 보는 성격이에요. 남은 재료들을 조합해서 완성된 메뉴로 만들지 고민하는 것도 좋아해요. ‘냉장고를 부탁해 ‘ 스타일이죠. (웃음) 그래도 꽤 맛있답니다.

냉장고 관리가 배우 김신록의 ‘마인드 관리’라는 게 흥미로운데요.

밖은 위험해요.(웃음) 무대나 촬영 현장은 수많은 욕망과 주체가 얽히는 공간이라서 제 마음대로 통제할 수 없는 일이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 집 냉장고 안은 다르죠. 질서를 세우고 원하는 방식으로 유지할 수 있다는 점에서 안정감과 위안을 줍니다. 글쓰기도 마찬가지예요. 마감 있는 글을 쓰는 시간은 제 자신을 정돈하고, 또 정화시키는 과정이에요.

특정한 시기마다 마음에 품는 화두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요새는 “표방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붙잡고 있어요. 사전을 찾아보니 ‘표방’의 뜻은 ‘어떤 명목을 붙여 주의나 주장 또는 처지를 앞에 내세우다’네요. 특정 캐치프레이즈나 태도를 내세우는 순간, 행동은 오히려 어떤 결과 감응을 잃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무대 위에서도 제가 할 일을 심플하게 하면 되는데, 도발하고 압도하겠단 마음까지 전하려고 애쓰는 것처럼요. 진짜 행동하는 힘을 더 기르고 싶습니다. 연기도, 삶도 결국 이러한 태도를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에디터 최선우
포토그래퍼 맹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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