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의 갈림길 앞에서 내 안의 용기와 욕망을 믿습니다

A   PERSONA   45

영화 수입사 찬란 대표, 이지혜

Sep 4, 2025

이지혜는 영화 수입·배급사 ‘찬란’의 대표다. 영화 잡지 기자로 출발해 영화 마케팅 회사를 거쳐 찬란을 세운 그는, 매해 변화하는 영화 시장에서 불확실성을 기회로 삼으며 자신만의 길을 개척했다. 올해로 15주년을 맞은 찬란은 독창적인 시선으로 장르의 경계를 넓히는 작품들을 꾸준히 선보이며, 국내 예술 영화 수입사 중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불안을 기꺼이 껴안으며 과감한 선택을 이어온 그는 자신을 움직이는 힘이 내면의 용기와 욕망에서 나온다고 말한다.

어떤 영화가 대표님을 영화업계로 이끌었나요?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 테이프>. 스티븐 소더버그 Steven Soderbergh 감독의 인디 영화인데요. 전형적이지 않은 스토리텔링과 분위기 속에서 영화가 가진 새로운 매력을 발견할 수 있어요. 어릴 적부터 영화를 좋아했지만, 이 영화를 통해 처음으로 ‘영화를 다른 시각으로 볼 수 있겠다’라는 가능성을 느꼈죠.

영화업에서만 30여 년을 걸어왔습니다. 여전히 영화가 재밌나요?

찬란을 통해 주로 예술 영화를 수입하지만, 저는 영화를 정말 다양하게 봐요. <인디아나 존스 2>, <다크 나이트> 같은 상업 블록버스터 영화를 제 인생 영화라고 말하곤 하죠.(웃음) 영화나 스토리 기반 콘텐츠에 대한 진입장벽이 낮은 편이라, 보는 것 자체가 항상 즐겁거든요. 아마 그것이 제가 즐겁게 일할 수 있는 바탕일 거예요. 다만, 영화를 수입해서 국내에 개봉하는 순간, 즉 영화가 상품이 되는 순간에는 비로소 고통이 찾아옵니다.

지난해는 찬란에게 가장 성공적인 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악마와의 토크쇼>, <존 오브 인터레스트>, <서브스턴스>가 잇달아 흥행했어요.

가장 기쁜 점은 이 작품들이 그동안 찬란이 지향해온 영화들과 다르지 않다는 거예요. 우리가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과 쾌감이 있었죠. 특히 <존 오브 인터레스트>가 관객 수 20만 명을 돌파한 건 정말 고무적이었어요. 쉽지 않은 영화인데, 동시에 아름답고 또 끔찍할 만큼 깔끔하게 구성된 화면의 대비가 주는 공포가 정말 압도적이잖아요.

찬란은 일찍이 아리 에스터 감독의 <유전>, <미드소마> 등을 소개하며 ‘호러 영화 명가’라는 평을 얻기도 했습니다.

호러 영화를 수입한 건 전략적인 결정이었어요. 2010년대 중반부터 예술 영화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경쟁이 훨씬 치열해졌거든요. 호러는 완전히 상업 영화라고 할 수는 없지만 탄탄한 마니아층이 있는 장르예요. 사실 예술 영화 중 좋은 작품은 정말 많지만, 순수하게 재미있는 영화를 찾기는 쉽지 않거든요. <서브스턴스>가 특별하게 느껴졌던 이유도 그 때문이에요. 재미와 스릴, 예술성과 화제성까지 다 갖춘 드문 영화라서, 찬란이 15년간 구입한 영화 중 가장 비싸게 샀어요. 배우 데미 무어 Demi Moore에게 얼굴 도장 한 번 찍으려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새벽에 열리는 영화제 애프터 파티에 가기도 했고, 영화 세일즈사 사무실에 무작정 찾아가 기다리기도 했죠.

“빠르게 결정하지 않으면 성공의 기회를 놓칠 수 있습니다. 결국 욕망이 이끄는 순간에는 과감하게 밀고 나갈 수밖에 없죠.”

찬란을 가장 잘 표현하는 키워드를 꼽아본다면요?

'과감한 도전’이요.

성격이 좀 과감한 편인가요?

한 회사를 온전히 저의 책임으로 이끌면서 제 안에 과감한 면이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선택을 끝까지 밀고 나갈 수 있는 용기와 도전 정신이 15년 가까이 이 회사와 저를 지탱해 준 힘이죠. 하나 더 꼽자면 욕망이에요. 욕망이 없다면 이 일을 할 수 없어요. 너무 위험하잖아요. 한 편의 영화로 처절하게 외면 받고 실패할 때도 있으니까요.

영화를 수입하기까지 상당한 고민 과정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물론이죠. 하지만 빠르게 결정하지 않으면 성공의 기회를 놓칠 수 있습니다. 결국 욕망이 이끄는 순간에는 과감하게 밀고 나갈 수밖에 없죠.

불안은 어떻게 다루나요?

항상 불안한 상태로 살아요.(웃음)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정서적 불안함은 사라졌어요. 해야 할 일이 많다 보니 외롭거나 고독하다고 느낀 적은 거의 없어요. 일을 하면서 제 성향을 더 잘 알게 되었고 그래서 지금까지 이런 선택을 해올 수 밖에 없었다는 걸 받아들이게 됐거든요. 그 이후로는 마음이 훨씬 편해졌습니다. 삶에서의 모든 선택은 늘 장단점이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결혼이나 아이가 아닌 이 일을 선택했고, 그 덕분에 제 또래와는 다른 삶을 살고 있어요. 분명히 가지지 못한 것이 있지만 반대로 그 선택 덕분에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을 할 수 있는 거죠.

영화가 대표님의 생각이나 태도에 변화를 준 경험이 있나요?

무라카미 하루키 Haruki Murakami의 동명 단편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일본 영화 <토니 타키타니>가 떠오르네요. 주인공 토니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며 남긴 수많은 재즈 레코드를 물려받고, 이후 집착적으로 옷을 모으던 아내마저 사고로 잃게 돼요. 결국 그는 남겨진 엄청난 물건들을 정리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죠. 그 영화를 보면서 ‘내가 남긴 물건이 누군가에게는 짐이 될 수 있겠다’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사실 저는 물건에 대한 집착이 강한 편이었는데, 그 작품을 본 뒤로는 조금이라도 내려놓고 버리며 살아야겠다고 다짐했어요. 물건뿐 아니라 사람과의 관계, 심지어 부모님과의 관계도 언젠가는 떨어뜨려서 바라봐야 한다는 생각도 하게 됐죠. 언젠가 누군가에게 남겨질 수 있는 무게를 스스로 줄여낼 수 있어야 한다는 깨달음이었어요.

어떤 영화가 좋은 영화일까요?

마음을 움직이는 영화요. 사람들이 영화나 예술 문화를 찾는 이유도 결국 마음에 있는 것 같아요. 마음의 아픔을 치유하거나, 속상한 기분을 위로 받거나, 혹은 즐거움을 얻기 위해 우리는 마음을 건드려주는 작품을 찾는 거죠. 아무리 완성도가 높고 재밌는 작품이라도 마음을 울리지 않는다면, 이렇게까지 노력하지는 않을 것 같아요.

어떤 장면이 아름답다고 느끼나요?

자연스러운 모습에서 균형을 발견할 때 아름다움을 느껴요.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미장센처럼요.

에디터 한동은
포토그래퍼 맹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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