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미래보다 오늘에 집중하며 앞으로 나아갑니다”

A   PERSONA   47

매뉴얼 그래픽스 디렉터, 이성균

Sep 18, 2025

이성균은 GS아트센터와 웹매거진 타이포그래피 서울, 고급주거 에테르노 등 다양한 브랜드의 아이덴티티를 설계하는 디자인 스튜디오 매뉴얼 그래픽스의 디렉터다. 웹으로 출발한 매뉴얼 그래픽스가 편집과 패키징, 브랜드 아이덴티티로 영역을 확장할 수 있었던 건 ‘매체만 다를 뿐, 디자인은 하나’라는 그의 믿음 덕분이다. 차근차근 기반을 닦아온 이성균은 이제 대화와 관찰을 통해 브랜드의 본질을 길어 올리고, 그 흐름을 하나의 경험으로 엮어낸다. 확고한 정체성을 가진 브랜드만이 빛을 발할 수 있다고 믿는 이성균은 섣불리 삶의 앞날을 예측하기보다, 자신이 잘할 수 있고 마음 깊이 끌리는 일을 올곧게 밀고 나간다.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디자인할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지점은 무엇인가요?

작업하는 내내 ‘이게 브랜드의 진정한 아이덴티티일까'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집니다. 본격적으로 아이덴티티를 디자인하기 전에는 반드시 브랜드 대표와 대화하며 정체성을 좁혀가는데, 절반 이상은 방향이 명확하지 않은 상태에서 시작합니다. 브랜드 관계자와 소비자가 바라보는 브랜드 이미지가 서로 다른 경우도 흔하죠. 여러 사람과 이야기하고, 꾸준히 관찰하면 서서히 브랜드의 윤곽이 드러나요. 그때부터 차근차근 정제해 갑니다.

브랜드에 대한 내부 관계자와 소비자의 시각이 다르다면 어디에 더 무게를 두나요?

브랜드 관계자, 특히 대표의 시각을 우선합니다. 예컨대 ‘신뢰받는 브랜드를 만들고 싶다’라는 목표라면 보통 파란색을 고르지만, 대표가 빨간색을 선호한다면 저는 빨간색을 우선으로 고려해요. 의외라고 생각하시죠?(웃음) 대표는 브랜드에 대해 가장 깊이 고민하고, 진정으로 잘되기를 바라는 사람입니다. 그들의 의지를 잘 이해하고 그곳에 아이덴티티의 중요한 지점이 있다고 믿을 떄 비로소 브랜드만의 매력이 생깁니다.

탄탄하게 디자인된 브랜드 아이덴티티가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유효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고 보나요?

아뇨, 오히려 그 가치는 끊임없이 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몇 개월 혹은 1년간 고민해 지금 시점에 완벽히 부합하는 아이덴티티를 만든다 해도 시간이 지나면 아쉽거나 개선해야 할 부분이 늘 생기죠. 중요한 건 필요한 것을 받아들이고, 지킬 건 지켜가며 계속 다듬는 과정입니다. 아쉬운 점은 매뉴얼 그래픽스의 역할이 그 단계까지 이어지지 못한다는 거예요. 일반적으로 로고, 컬러, UX/UI, 웹사이트 등의 결과물을 클라이언트에 건네면 그것으로 프로젝트는 끝납니다. 하지만 그건 브랜드 데피니션 Brand Definition에 지나지 않아요. ‘이렇게 해보자’라는 일종의 선언이죠.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레 브랜드의 본질과 역할이 달라집니다. 초기에 계획했던 브랜드 정의가 부합하지 않을 때도 있죠. 그 변화를 반영하며 조금씩 다듬어갈 때 비로소 아이덴티티가 완성된다고 할 수 있어요. 저희도 브랜드 정의에 머무르지 않고, 꾸준히 지켜보며 더 고유한 모습으로 다듬어가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미래를 앞서 예측하기 보다 현재에 집중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지금의 과정을 충실히 해 나가는 게 제게는 더 좋고, 의미 있는 일입니다.”

브랜드 아이덴티티는 웹사이트, 그래픽, 패키지 등 다양한 채널을 통해 소비자에게 전해지는데, 매체의 개별성을 지키면서 매뉴얼 그래픽스만의 일관된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신경 쓰는 부분이 있나요?

모든 매체를 세세하기 관리하기는 어렵습니다. 특히 인테리어처럼 전문 노하우가 필요한 영역은 저희가 직접 관여하기 힘든 부분이죠. 그래서 프로젝트 초반에 아이덴티티 가이드를 설정하고, 그에 맞춰 디테일을 조율합니다. GS아트센터의 경우 '성장과 새로움에 대한 태도', '영감을 주는 예술과 콘텐츠', '모두에게 열려 있는 공간'이라는 세 가지 핵심 가치를 강조하기 위해 그래픽으로 세 개의 라인을 만들어 아이덴티티를 표현했습니다. 가이드를 바탕으로 조명 같은 인테리어 요소도 세 개로 통일해 공간에서도 아이덴티티의 축을 경험할 수 있도록 했죠.

GS아트센터 외에도 고급주거 어퍼하우스, 에테르노 등 그간의 작업을 살펴보면, '미니멀'이라는 키워드가 떠오릅니다.

정확해요. 개인적으로 복잡하고 밀도 높은 것보다는 심플한 것을 선호하기도 하고, 운영 측면에서도 요소를 최소화하는 편이 효과적이거든요. 웹사이트나 브랜드 매뉴얼을 저희가 만들었어도 사용하는 건 클라이언트이기 때문에 장치를 과하게 두어 혼란을 주기보다는 최소한의 요소를 최대한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중요합니다.

매뉴얼 그래픽스의 작업을 서체에 빗댄다면 어떤 폰트를 고르고 싶나요?

고민 없이 ‘프리텐다드 Pretendard’ 입니다. 프리텐다드는 디지털과 인쇄 등 다양한 환경에서 안정적으로 쓰일 수 있고, 일정 수준 이상의 미감을 담보하면서도 무료로 제공된다는 점이 매력적입니다. 안정성과 사용성을 두루 고려한 기능적 디자인은 매뉴얼 그래픽스가 지향하는 미감과도 닮아 있죠. 또 프리텐다드는 시간이 지나면서 꾸준히 개선되는데, 이런 지속과 확장의 모습은 저희가 추구하는 태도이자 아름다움이기도 합니다.

웹사이트와 매뉴얼 그래픽스의 블로그 ‘매그진’에는 결과물 뿐 아니라 선택되지 못한 기획안, 고민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과정을 기록하는 이유가 있나요?

과정은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최고의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죠. 프로젝트를 하다 보면 공들인 작업이 한순간에 뒤집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경우도 흔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결과물이 어떤 과정을 거쳐 탄생했는지 전혀 모르죠. 최종 작업물에는 우리가 쏟은 고민과 시도가 모두 담기지 않을테니 당연해요. 그래서 과정을 기록으로 남기는 일이 중요합니다. 결과물보다 과정의 기록에서 더 편안함을 느끼는 클라이언트가 많은 것도 그 때문일지 모릅니다.

블로그를 통해 사적인 생각까지 차곡차곡 쌓아가고 있습니다. 디렉터님에게 기록은 어떤 힘을 주는 행위처럼 보여요.

가장 좋아하는 시간은 블로그에 글을 쓸 때입니다. 기록할 때마다 에너지가 채워지는 걸 느껴요. 평소 흘려보내는 생각들이 많은데, 글로 기록하면 두고두고 다시 볼 수 있잖아요. 그래서 틈틈이 글 쓰고, 사진 찍어요. 붙잡고 싶은 것을 기록해서인지 제가 쓴 글은 이상하게 자꾸 보게 됩니다. 마음에 드는 글은 몇 달, 혹은 1년 뒤에도 꺼내 읽으며 수정하죠. 지금도 몇 년 전 블로그에 쓴 ‘엄마’와 ‘손’이라는 글을 수정하고 있습니다.(웃음)

최근에 글로 남기고 싶었던 순간은 언제였나요?

뻔하지만 역시 가족과 함께 한 순간이 아닐까요? 올해 딸이 열 살이 됐는데, 더 크면 가족과 자주 시간을 보내려 하지 않을 거라는 이야기를 종종 듣거든요. 더 늦기 전에 지금을 최대한 남겨 보려 합니다.

인생을 하나의 프로젝트로 본다면, 지금은 어떤 단계에 와 있다고 생각하나요?

브랜드 정의를 마친 상태쯤 되겠네요. 1차로 브랜드를 정의해 대중에게 퍼블리싱 했고, 앞으로 필요한 부분을 다듬으며 아이덴티티를 좀 더 뾰족하게 세워가는 단계죠. 몇 번을 더 다듬어야 온전한 ‘이성균’, ‘매뉴얼 그래픽스’를 만날 수 있을지는 저도 모릅니다. 미래를 앞서 예측하기 보다 현재에 집중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처음 ‘매뉴얼’이라는 이름으로 디자인 스튜디오를 세우고, 좋아하는 것들로 확장하면서 ‘매뉴얼 그래픽스’로 발돋움했던 것처럼, 앞으로도 좋은 것들을 채우고, 필요하다면 덜어내면서 조금씩 나아가고 싶습니다. 지금의 과정을 충실히 해 나가는 게 제게는 더 좋고, 의미 있는 일이에요.

에디터 정신오
포토그래퍼 맹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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