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감각을 받아들일 수 있는 백지 상태를 유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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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 디자이너·SWNA 대표, 이석우

Nov 28, 2024

이석우는 프로젝트의 본질을 탐구하는 산업 디자이너이다. 생활용품부터 전자제품, 운송수단, 아파트 주거 환경까지 삶에 필요한 모든 걸 디자인하고 컨설팅하는 그가 중요하게 여기는 건 조형성이 아니라 맥락과 관점이다.

2011년에 SWNA를 설립해 지금까지 산업 디자인 및 디자인 컨설팅 프로젝트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변하지 않은 대표님만의 디자인 철학이 있나요? 

작업을 대하는 태도가 항상 같아요. 결과물의 형태를 먼저 떠올리기보다는 프로젝트를 왜 시작하는가에 관한 본질을 탐구하죠.

공간에 놓인 다양한 프로토타입 모델을 통해서도 SWNA만의 작업 태도를 엿볼 수 있습니다.

만들어진 결과물들을 훈장처럼 공간에 진열하고 싶지 않아요. 이미 저희 손을 떠난 제품을 보면 아쉬움만 남길 뿐이죠. 반대로 프로토타입 모델은 의도적으로 수집해 보이는 곳에 진열하고 있어요. 과정의 일부이기 때문에 결과물을 마음껏 상상할 수 있거든요. 저는 SWNA가 확고한 색을 가지기보다, 능동적으로 변화할 수 있는 디자인 스튜디오가 되면 좋겠다고 항상 생각해요. 그리고 그런 여정이 프로토타입 모델에 깊이 새겨져 있다고 믿어요.

시나리오 기법을 디자인 과정에 적용하는 것 또한 작업 태도와 관련 있겠군요.

그런 셈이죠. 결국에 사용자가 어떻게 제품을 활용할지 예측하기 위해 시나리오 기법을 활용하는 거니까요. 20대를 타깃으로 한 소형 가전을 디자인한다고 가정하면, 20대 대학생을 시나리오 속 주인공으로 삼아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거예요. 그가 아침에 일어나면 가장 먼저 할 행동과 어떤 옷을 즐겨 입는지, 즐겨 사용하는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은 무엇인지, 어떤 라이프스타일을 향유하는지를 상상하는 식이에요. 그렇게 가상 인물의 삶을 시나리오로 작성하면 자연스레 타깃에 적합한 소형 가전을 떠올릴 수 있죠. 제품에만 초점을 두는 것이 아닌, 제품을 사용하는 소비자와 놓을 공간, 그리고 그 안에서 형성되는 문화까지 다양한 면을 고려해 디자인하는 것이야말로 산업 디자이너의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흥미로운 접근 방식이네요. 모든 프로젝트에 시나리오 기법을 적용하나요?

꼭 그렇지만은 않아요. 범용적으로 활용하는 의자의 경우, 특정한 타깃의 삶을 조명하기보다는 가구의 역사를 살피는 게 중요해요. 의자의 변천사를 살펴보면 특정 모델이 등장한 시기의 시대상을 유추할 수 있는데요, 현시대에 필요한 의자를 디자인하는 데 있어 좋은 길라잡이가 되죠.

“감각 또한 외부가 아닌 작업을 받아들이는 자신의 태도에서 온다고 생각해요.”

산업 디자인에서 프로젝트의 맥락을 이해하는 과정은 상당히 중요해 보입니다.

산업 디자이너에겐 동시대적 삶과 제품의 본질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도록 숙성 과정이 필요해요. 숙성 과정에서 프로젝트에 관한 목적성과 사용성, 시장성이 무엇인지 고민하죠. 무엇보다 프로젝트의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 다양한 리서치 과정을 거치는데요, 업계 동향 분석과 관련한 시각 자료를 찾는 건 물론이고, 클라이언트와 예비 사용자를 인터뷰하는 등 최대한 논리적인 사고로 정보를 수집합니다. 이처럼 상상하고, 조사하고, 수집하고, 프로토타이핑하고, 실행하기를 반복하며 시행착오를 줄여야만 클라이언트와 산업 디자이너 모두에게 좋은 결과물을 선보일 수 있는 거예요. 이는 SWNA가 전자제품부터 운송수단, 시상식 메달과 트로피, 아파트 단지 리뉴얼 등 삶에 필요한 모든 디자인 프로젝트를 담당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산업 디자이너를 희망하는 이들에게 업계 선배로서 조언을 한다면요?

UX도 조금 알고, 형태감도 조금 알고, 브랜드도 조금 아는 ‘제너럴리스트’는 산업 디자인 업계에서 경쟁력이 없어요. 본인만의 ‘피벗’을 찍어야 해요. 하나를 정통하게 알고 가지를 칠 줄 알아야 하죠. 저는 산업 디자이너 또한 대학 졸업 후 5년 정도의 숙성 과정이 필요하다고 봐요. 자신의 강점이 제품의 형태를 디자인하는 것이라면 3년간 그와 관련한 일을 성실히 수행하며, 자기만의 능력을 다지고, 이후 2년 동안 만들어진 형태를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을 경험해야 산업 디자이너로서 자신의 진가를 발휘할 수 있는 것이죠. 그러니 너무 조급해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SWNA는 소속 후배 디자이너들의 개인 작업을 지원하는 ‘리버럴 오피스’를 운영하고 있어요. 

산후조리원에 가면 산모와 아기들을 케어하고 마사지 해주는 분들이 있잖아요? 그들을 위한 별도의 마사지 복지가 있다고 해요. 마사지하는 사람들도 마사지를 받아야 일을 계속해서 할 수 있다는 논리에서 시작한 복지이죠. 저 또한 저희 소속 디자이너들에게 환기를 주고 싶었어요. 클라이언트 일만 하다 보면 어느 순간에 자기만의 날 선 감각이 무뎌질 수도 있으니, 평소 하고 싶은 개인 작업을 눈치 보지 않고 할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한 것이죠. 리버럴 오피스 Liberal Office의 목적은 분명해요. 소속 디자이너에게 제작비를 지원하고, 디자이너들의 창의성을 높여주는 역할을 돕는 것이죠. 실제로 리버럴 오피스를 통해 나온 작업물을 모아 전시하고, 디자인 토크쇼를 개최하고, 판매까지 하고 있어요. 수익금의 경우 회사와 담당 디자이너가 서로 나누고요. 회사로선 소속 디자이너들의 개성과 장점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업무를 하는 데 오히려 큰 도움이 되고 있어요. 참여 디자이너들 또한 활력과 영감을 얻는다는 피드백을 주고 있고요.

SWNA도 처음이 있었죠. 현재의 SWNA를 만들어 준 대표 프로젝트를 꼽는다면 무엇일까요?

e편한 세상 아파트 브랜드를 리뉴얼하고 마스터 플랜을 총괄한 일을 먼저 얘기할 수 있을 거 같아요. 덕분에 산업 디자인 업계에 SWNA의 이름을 각인시켰거든요. 전등 스위치부터 온도조절기, 월패드, 방문 손잡이, 단지 내 가로등, 주차 차단기까지 아파트에 필요한 전반적인 디자인을 담당함은 물론 현시대에 필요한 주거 공간의 해답을 제시한 프로젝트로 높은 평가를 받았어요. 폐목재를 활용한 가구 브랜드 ‘매터앤매터 Matter & Matter’를 전개한 경험도 저희에겐 큰 자산이 됐고요. 그 경험을 바탕으로, 가구 브랜드와 협업해 조명이나 의자 등을 만들 수 있게 됐죠. 한글을 모티브로 작업한 평창 동계올림픽 메달 디자인 작업도 의미 있는 작업입니다.

오랜 기간 산업 디자이너로서 감각을 유지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나요?

매일 같이 완결된 문장을 읽으려고 노력해요. 눈 뜨면 종이 신문을 펼치고, 업무 외적인 시간에는 분야 상관없이 다양한 장르의 책을 동시에 읽죠. 또 다른 한편으론 저만의 일상에 좀 더 집중하려고 노력해요. 일종의 쉼을 갖는 건데요. 의도적으로 저의 정신 상태를 백지로 만들어서 새로운 감각을 쉽게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죠. 물을 빨아들이기 위해 필요한 건 물을 이미 흥건하게 빨아들인 젖은 스펀지가 아닌, 바짝 마른 스펀지잖아요. 많은 디자인 페어에 방문해 다양한 작품들을 보는 것도 좋지만, 그런 것에서 잠시 멀어지는 노력도 중요해요. 계획 없이 떠난 여행지에서 펼친 잡지나 책을 통해서 받은 영감이 더 오래 남을 때가 있는 것처럼, 결국에 감각 또한 외부가 아닌 작업을 받아들이는 자신의 태도에서 온다고 생각해요.

새로운 감각을 효과적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고즈넉한 한옥들 사이에 사옥을 마련한 걸까요?

5년 전에는 홍대 인근에 사옥이 있었어요. 당시엔 홍대의 빠른 변화를 보는 것이 즐거운 시절이었죠. 오후부터 붐비는 동네에 있다 보니 자연스레 작업 시간도 늘어졌고요. 점심을 먹으면서 항상 저녁 메뉴를 생각할 정도로 야근을 당연시했거든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런 패턴이 점점 피로로 다가오더라고요. 그래서 조용한 동네로 오게 됐어요. 놀랍게도 이 동네는 오전이 활기차고, 오후가 조용하더군요. 지금은 저도 동네 분위기에 따라서 아침 8시에 출근하고 늦어도 오후 5시에는 퇴근하려고 해요.

환경의 변화가 작업에 어떤 식으로 영향을 주는지도 궁금합니다.

작업하는 동안 생기는 감정 기복이 좀 줄었는데요. 동네 환경 때문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론 자연스러운 변화 같기도 해요. 제가 마흔 살에 이곳으로 왔거든요. 마흔 살이 된 이후부터 확실히 정신적으로 한 단계 성장한 느낌이 들어요. 30대 때는 일이 안 풀리면 풀릴 때까지 자리에 앉아가며 머리를 쥐어짰거든요. 하지만 지금은 짧은 시간 동안 빠르게 작업하고, 회의도 길게 하지 않아요. 업무 시간이 지났는데, 일을 다 못했다고 해도 미련 없이 정리하고 퇴근하죠. 운동, 가족과의 식사 등 저만의 시간을 갖는 것이 작업하는 데 더 도움이 된다는 걸 아는 나이가 된 거예요. 일을 내려놓는다는 의미를 이제는 좀 알 것 같아요.

에디터 서재우
포토그래퍼 윤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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