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락을 살피는 자세가
공감의 깊이를 더합니다

A   PERSONA   57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노현재

Dec 4, 2025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노현재는 사람의 마음을 다루는 일을 섬세한 감각으로 확장해 온 의사다. 환자의 삶을 이루는 환경과 경험의 층위를 함께 살피며, 혼란을 결함이 아닌 이해와 공감의 관점에서 바라본다. 진료실 밖에서는 자신이 겪어 온 서툼과 느린 리듬을 솔직히 나누며 글과 강연을 통해 복잡한 마음을 돌보는 방법을 전하고 있다. 결국 그에게 의사의 역할은 사람의 이야기를 깊이 듣고, 그 안의 질서를 함께 찾아 앞으로의 삶을 다시 설계할 수 있도록 힘을 보태는 일이다.

얼마 전 <아 맞다, 나 ADHD였지?>를 출간했습니다. 책을 쓰게 된 계기가 있나요?

가족과 친구들은 늘 정신없는 저를 유쾌하게 바라봐줬어요. 일상에서 크고 작은 문제가 많았는데도 비난하기보다 “너 되게 웃기고 엉뚱하다”, “현재는 약속을 두 번 말해야 해”라며 부족한 부분을 챙겨줬죠. 정신건강의학과를 전공하면서 저 뿐만 아니라 어머니 역시 ADHD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저의 잦은 실수에도 화내기보다 “착하면 됐다”라며 늘 위로해 주셨어요. 어리버리하고 때론 주눅 들어 있는 저를 항상 공감하고 위로해 주셨는데, ‘그냥 사람 구실만 하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대요. 그런 환경 덕분에 자신을 결함 덩어리로 보지 않고, 그 시선으로 ADHD를 이야기하고 싶다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책으로 이어졌습니다. 사실 처음엔 환자들에게 선물하려고 <아, 맞다. 내가 진료 중이었지?>라는 작은 독립 출판물을 만들었어요. 글쓰기를 좋아하고, 제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공감이 되면 좋겠다는 마음이었죠. 그 책을 본 출판사에서 연락을 줘서, 감사하게도 이번 책까지 출간하게 됐습니다.

ADHD 진단을 받은 후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고요?

전공의 수련 시절, 몇 년째 미뤄온 논문 때문에 결국 교수님께 “아무리 써보려고 해도 책상에 앉아 5분만 지나면 미치겠고 도망가고 싶다”라고 털어놨습니다. 그 일을 계기로 검사를 권유받았고, 예상대로 성인 ADHD 진단을 받았어요. 그 전까지는 일을 끝까지 마무리하지 못하고 덤벙거리는 저 자신을 ‘한심하고 멘탈이 약한 사람’이라고만 여겼던 것 같아요. 그런데 진단 이후에는 ‘내가 기능적으로 어려운 부분이 있구나’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면서, ‘어떻게 하면 더 잘 살 수 있을까, 어떤 방식이 나에게 맞을까’를 훨씬 현실적이고 명확하게 떠올릴 수 있었어요. 이 변화가 제 인생에서 큰 전환점이었다고 생각해요.

스스로 ADHD임을 공개하는 것에 대한 부담은 없었나요?

굳이 어디 가서 “저 ADHD입니다”라고 밝히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책을 내기 전부터 진료 중 비슷한 어려움을 겪는 환자들에게는 제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어요. ‘나도 ADHD니까 잘 안다’라는 식이 아니라, ‘당신이 겪는 어려움들이 내게도 익숙한 감정이다’라는 마음을 전하고 싶었죠. 환자들에게 ‘이건 인격적 결함이 아니라 감기처럼 누구에게나 생길 수 있는 일’이라고 설명하면서 정작 제 일은 숨기고 전전긍긍하는 것이 좀 비겁하게 느껴지기도 했고요. 물론 ‘내 실수는 ADHD 때문이에요’라는 식의 변명은 원치 않습니다. 그래서 누구에게도 그렇게 받아들여지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필요할 때만 꺼내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전체 맥락 속에서 그 사람을 볼 때 비로소 공감할 지점이 선명해지니까요.”

여러 전공 분야 중 정신건강의학과를 택한 이유도 궁금합니다.

소아과와 정신건강의학과 사이에서 정말 많이 고민했어요. 아이들도 좋아하고, 또 한 사람을 오래 보면서 진료하는 게 제 성향에 잘 맞아서 두 과 모두 끌렸거든요. 그러다 ‘정신건강의학과를 택하면 아이들의 마음도 돌볼 수 있겠다’ 싶어 결국 정신건강의학과를 선택했습니다. 평소 인문학·철학·예술에 관심이 많아 정신과에 막연한 로망도 있었어요. 대학병원 정신건강의학과에서 환자들을 오래 진료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정이 드는데, 저는 그 시간이 좋더라고요.

의사가 되는 과정 중 선택에 대해 후회하거나 진지하게 다른 길을 고민한 순간은 없었나요?

호기심이 많고 과몰입도 심하지만 쉽게 질리고 겁도 많은 성격이라, 전공의 수련 중에도 ‘다른 길도 있지 않을까?’ 하는 유혹에 자주 빠졌어요. 어릴 땐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다’라는 마음이 커서 래퍼를 꿈꾸며 강습받기도 했고, 휴학을 고민하다 혼난 적도 있습니다. 의대 졸업 후에는 헬스케어 스타트업을 함께 해보자는 제안을 받고 진지하게 고민했지만, 막상 겁이 나 한발 물러섰고, WHO 같은 국제기구에 관심이 생겨 업계 선생님께 메일을 보내며 여러 시도를 하기도 했죠. 돌이켜보면 의사 사회가 무서워 도망치려 했던 건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그 과정에서 만난 사람들과 경험이 지금 진료할 때 큰 도움이 되고 있어요. 후회보다는 ‘내가 참 많이 기웃거렸구나’ 하고 웃어넘길 수 있는 일들이 수두룩해요.

일하는 내내 침착함과 친절함을 유지해야 한다는 점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 것 같아요.

많은 분이 “우울한 얘기를 매일 듣는 거 힘들지 않냐”라고 묻지만, 저는 그 부분은 괜찮아요. 정작 힘든 점은 내 판단이 맞는지에 대한 불안이에요. 정신건강의학과는 수치로 딱 떨어지는 검사가 없고, 치료 반응도 바로 나타나지 않는 경우가 많거든요. 경과가 좋지 않으면 ‘내가 뭘 잘못 본 걸까’ 하는 생각에 빠지죠. 스트레스 해소는 뻔하지만 운동이에요. 거의 매일 빠짐없이 하고, 농구·테니스·풋살처럼 사람들과 함께하는 운동을 특히 좋아해요. 음악도 제 상태를 비추는 일종의 신호처럼 작용합니다. 가령 예 Ye 음악을 많이 들으면 ‘아, 요즘 좀 우울하구나’, 아이돌 노래가 많아지면 ‘오늘은 텐션이 올라왔네’ 하고 알게 되죠. 이렇게 내 상태를 알아차리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가 많이 줄어요.

좋은 의사란 어떤 의사라고 생각해요?

몇 해 전 외할아버지께서 의료 사고로 돌아가셨어요. 수술 부위가 소독 문제로 감염돼 여러 합병증을 겪었죠. 가족이면서 동시에 의사였던 저는 ‘좋은 의사란 뭘까’를 더 깊게 고민하게 됐습니다. 그 이후 의료윤리연구회 활동을 하고 관련 번역서 작업도 하며 지금까지도 계속 그 질문을 붙들고 있어요.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로서 가장 중요하다고 느끼는 건 두 가지예요. 첫째는 정말 ‘잘 듣는 것’. 둘째는 ‘그 사람의 맥락을 함께 보는 것’입니다. 같은 증상이라도 누구에게, 언제, 어떤 상황에서 나타났는지에 따라 의미가 완전히 달라지거든요. 아무리 좋은 치료 옵션이 있어도 환자의 직업·가족 구조·경제 상황을 고려하지 않으면 교과서적으로는 맞지만, 현실에선 실패할 가능성이 높아요. 제가 생각하는 좋은 의사는 의학 지식이 많은 사람보다, 그 지식을 각 개인에게 맞게 변형해 적용할 방법을 끝까지 고민하는 사람이에요.

다른 세대, 전혀 다른 삶을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에 공감하기 위해 어떤 방법을 고려하나요?

행동만 보면 이해되지 않을 때가 있어요. 폭식, 자해, 분노 폭발 같은 행동이 특히 그렇죠. 그래서 저는 먼저 ‘이 행동이 이 사람에게 어떤 기능을 했을까’를 생각하려고 해요. 그 행동 말고는 그 순간을 버틸 방법이 없었을 수도 있으니까요. 또 사람을 볼 때 타고난 성향보다 어떤 환경에서 무엇을 배워왔는지에 더 주목합니다. 누군가 새치기를 하면 ‘급한 상황을 조율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나 보다’, ‘압박이 큰 경험이 많았나 보다’ 같은 여러 가능성을 떠올려요. 화가 나는 순간에도 이렇게 생각을 한 번만 돌리면 감정의 톤이 조금 달라지더라고요. 그리고 많은 분이 진료실에서는 꼭 필요한 정보만 말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데, 오히려 사소해 보이는 이야기까지 편하게 들려주셨으면 해요. 전체 맥락을 파악해야 그 사람에게서 공감할 지점이 더 선명하게 보이니까요.

직업 특성상 이성적 성향에 가까울 것 같은데, 실제로는 어떤가요?

이성적으로 일하다 보면 감정이나 분위기 같은 결이 무뎌질 때가 많다 보니, 일상에선 그런 감각을 잃지 않으려고 의도적으로 노력하는 편이에요. 좋아하는 물건의 영수증, 환자가 남긴 쪽지, 여행 티켓 같은 사소한 것들을 모으는데, 저는 이걸 ‘시간 수집’이라고 불러요. 기록이라기보다 어떤 순간을 담아두는 습관에 가깝죠. ADHD 성향 때문인지 부끄럽고 아쉬운 기억은 오래 남고 좋은 기억은 빨리 잊혀서, 이런 수집이 저에게 균형을 잡아주는 역할을 해요. 가끔 꺼내 보면 예상치 못한 따뜻함도 있고요. 진료 중 마음이 움직였던 장면이나, 환자를 통해 배운 점을 짧게 적어두는 것도 같은 맥락이에요. 이런 기록 덕분에 진료실이 결국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공간’이라는 사실을 잃지 않게 해주거든요. 진료는 제 삶의 큰 부분이라 기계적으로 흘려보내고 싶지 않아요. 정신과 진료가 마음을 다루는 일인 만큼, 이런 정서적 기록은 제게 꼭 필요한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외에 또 해보고 싶은 일이 있다면요?

조명 가게나 소품 가게를 자주 떠올려요. 섬세하고 위트 있는 디테일을 정말 좋아하거든요. 예를 들어 예상치 못한 곳에 달린 가방걸이 같은 건 사소해 보이지만, 공간 전체의 분위기를 따뜻하게 만드는 요소라고 생각해요. 그런 감각을 담은 가게를 언젠가 운영하고 싶어요.

에디터 이은경
포토그래퍼 맹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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