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는 인생을 반나절로
응축시킨 스포츠입니다

A   PERSONA   56

건축가·골프 코스 설계자·아시아 골프인문학 연구소 소장, 오상준

Nov 27, 2025

미국에서 건축을 공부하고 디자이너로 활동한 오상준에게 골프는 인생을 지탱하는 동시에 뒤흔든 스포츠다. 그는 오랜 시간 쌓아온 건축 커리어를 뒤로하고 골프의 원조국인 스코틀랜드로 건너가 골프 코스 설계학을 공부했다. ‘좋은 코스란 무엇인가’를 스스로 정의하기 위해 전 세계의 코스를 찾아다닌 경험은 자연스럽게 그를 골프 코스 전문가로 성장시켰다. 이후 그는 골프계 양대 매체 <골프다이제스트>, <골프매거진>의 세계 100대 코스 선정위원을 역임했고, 현재는 <골프위크> 코스 선정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지난 여름엔 40일간 유럽의 명문 코스 40곳을 직접 방문해 기록한 책 <40/40>을 펴내기도 했다. 그에게 골프는 자연과 인간이 가장 가까워지는 순간이며, 그 순간을 어떻게 설계하느냐가 그의 모든 작업을 결정한다.

골프 코스 설계자의 사무실은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습니다.

저희 어머니가 50년 넘게 이 건물 1·2층에서 산부인과를 운영했어요. 저 역시 이곳에서 태어나 미국에 가기 전까지 자랐고요. 팬데믹이었던 2022년, 이 공간의 구조와 인테리어를 직접 손봤어요. 기둥을 드러내고 낮은 층고를 최대한 열어 공간이 숨 쉴 수 있게 만들었죠. 화장실 벽은 철판으로 마감했는데 자석이 붙길래, 20년 동안 모은 피치마크 수리기와 볼마커를 하나씩 붙여두었고요. 자연스레 공간 곳곳을 골프용품들로 채우다보니, 지금은 저만의 작은 박물관 같은 장소가 되었네요.

피치마크 수리기와 볼마커 옆 몽당 연필들이 눈에 띕니다.

한국은 태블릿에 스코어를 입력하는 스마트 시스템이 일반적이지만, 미국이나 영국 등 유럽의 많은 코스에서는 여전히 연필과 스코어카드를 사용해요. 그래서 골프장 로고가 찍힌 짧은 연필을 나눠주는 곳이 제법 있어요. 이 연필들은 모두 전 세계 코스를 다니며 자연스럽게 모인 것들이죠. 저는 아날로그 감성을 좋아해요. 나무 골프 티 Tee 만 사용하는 이유예요. 손에 쥐었을 때의 촉감과 무게감, 스윙할 때 자연스럽게 부러지는 느낌까지 그 모든 과정이 골프의 전통과 더 가까워지는 순간이라 늘 끌리거든요.

차곡차곡 쌓인 시간과 경험이 느껴지네요. 처음 골프를 쳤던 순간을 기억하나요?

미국 유학을 떠나기 전 부모님과 몇 번 골프를 첬던 적은 있지만, 골프가 제 삶에 특별한 의미로 들어온 건 뉴욕에서 건축 디자이너로 일하던 시기예요. 9.11 테러 이후 외국인 비자 심사가 사실상 멈추면서 제 비자도 1년 넘게 나오지 않아 정말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죠. 그때 저를 버티게 해준 유일한 위안이 뉴저지 퍼블릭 골프장에서 치는 골프였어요. 2~3만 원이면 한 라운드를 돌 수 있었고, 추운 겨울날에도 한 샷, 한 샷 집중하며 마음을 다잡곤 했어요.

이후 골프를 즐기는 것을 넘어 코스를 설계하고 선정, 비평하는 전문가로 커리어를 확장했어요.

운 좋게도 국내 라이프스타일 잡지에 미국 골프 리조트 기사를 연재하게 되면서, 미국 전역의 뛰어난 코스를 직접 경험할 기회가 생겼어요. 곳곳을 취재하다 보니 ‘좋은 골프장을 플레이하는 즐거움만 누리는 데서 그칠 게 아니라, 언젠가 내가 만든 코스를 누군가가 즐길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처음 들었죠.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공부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고, 결국 영국으로 건너가 에든버러 대학에서 골프 코스 설계학을 공부하며 연구를 이어갔습니다. 제게는 새로운 길이 열리는 순간이었어요.

이전의 경험이 골프를 스포츠 이상의 문화로 바라보는 관점에 영향을 줬나요?

미국에서 건축을 공부한 경험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에 큰 영향을 줬어요. 워싱턴 대학교에서 실용적인 건축을 배웠고 컬럼비아 대학에서 석사를 하며 자하 하디드 Zaha Hadid와 스티븐 홀 Steven Holl 같은 당대 최고 건축가들에게 직접 배울 수 있었죠. 교수님들은 늘 “네가 알고 있는 건축을 다 잊고, 음악·미술·철학 어디에서든 아이디어를 얻어라”라고 강조했어요. 그때 길러진 전위적이고 다학제적인 사고방식이 지금도 제 설계 철학의 근간이 되었습니다. 덕분에 자연의 패턴을 코스 설계에 적용하거나, 조형을 전혀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보는 습관이 생겼죠. 골프 인문학을 통해 골프를 문화·역사·예술과 연결 짓는 것도 같은 맥락이고요.

“골프는 자연도, 사람도, 경험도 배제하지 않는 스포츠니까요. 코스 역시 그런 태도를 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해외 골프 코스를 소개하는 것을 넘어 국내 골프 문화에 대해서도 꾸준히 문제의식을 제기해 왔어요.

국내 골프 산업은 빠르게 성장했지만, 그만큼의 에티켓과 인문학적 고찰이 충분히 자리잡았는지는 늘 아쉬움이 남아요. 최근 미국 골프 전문가 16명과 한국 코스를 함께 돈 적이 있는데, 클럽하우스의 시설에는 감탄하면서도 필드에서는 “왜 피치 마크 보수를 하지 않느냐?”, “벙커 정리는 왜 제대로 되어 있지 않느냐?” 같은 질문이 이어졌어요. 솔직히 부끄러운 순간이었죠. 한국에서는 스윙 기술은 강조되지만, 골프가 가진 문화·철학·질서 같은 핵심 가치는 뒷전에 밀려 있어요. 그래서 요즘은 해외 코스를 소개하는 일보다, 한국 골프가 한 단계 더 성장하기 위해 어떤 태도와 문화가 필요한지 이야기하는 데 더 집중하고 있습니다.

많은 공부와 경험 끝에 탐닉한 ‘좋은 골프 코스’의 기준은 무엇인가요?

자연과 조화롭게 공존하는 코스가 ‘좋은 골프 코스’라고 생각해요. 골프는 인간과 자연의 가장 원초적인 상호작용이 녹아 있는 스포츠예요. 1400년대 스코틀랜드 바닷가에서 양을 키우던 목동들이, 양이 풀을 뜯어 평평해진 들판에서 돌멩이를 지팡이로 치던 놀이가 하나의 게임으로 발전한 것이 그 시작이니까요. 돌이 토끼굴로 들어가거나 언덕을 넘어가는 과정 자체가 곧 자연과의 상호작용이었죠. 진짜 명품 코스란 플레이를 하지 않고 방치하면, 과거 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복원될 수 있는 곳입니다. 지형을 파괴해서 만든 코스는 자연에 회복할 수 없는 큰 상처를 남기게 되죠. 설계 단계에서부터 지형과 생태를 깊이 이해해야 친환경적인 코스를 만들 수 있습니다. 한 가지 더 덧붙이자면 초보자부터 프로선수까지 누구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도전할 수 있는 코스여야 해요. 설계자가 티잉 그라운드 teeing ground, 페어웨이 fairway, 그린, 벙커를 배치할 때, 초보자는 돌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고, 상급자들은 도전할 수 있는 장애물을 지혜롭게 배치한 코스가 좋은 코스입니다. 골프는 자연도, 사람도, 경험도 배제하지 않는 스포츠니까요. 코스 역시 그런 태도를 품어야 합니다.

세상에 어떤 제약도 없다면, 어떤 꿈의 골프장을 설계해보고 싶나요?

DMZ 접경 지역 외곽에 세계적인 골프 코스 3~4개를 설계하고 싶다는 상상을 해봤어요. DMZ는 70년 동안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자연의 영역이자 고요함과 긴장감, 그리고 깊은 역사성을 동시에 지닌 아주 특별한 땅이에요. 그곳에 세계적인 설계자들을 초청하여 전 세계의 골퍼들이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하는 코스’를 만든다면, 한국의 골프문화가 세계사에 큰 획을 긋는 일이 되지 않을까요?

현대 골프장이 빚는 문제를 뛰어넘는 거네요. 자연 친화적인 골프장이 가능하다고 보나요?

지금처럼 산을 깎아 만드는 방식에는 분명 한계가 있어요. 대신 폐염전이나 매립지, 버려진 농지처럼 이미 활용 가치를 잃은 땅은 훌륭한 코스의 재료가 될 수 있다고 봐요. 저도 현재 서해안 폐염전에 지어진 골프장을 리모델링하는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골프가 자연을 훼손하지 않고도 공존하는 방식은 충분히 가능해요. 필요한 건 의지와 철학이죠.

성공한 삶은 어떤 모습일까요?

혼자 있을 때도 편안하고 행복한 상태, 사회적 지위나 타인의 인정에 의존하는 대신, 내가 스스로 세운 목표를 이루어 마음이 충만한 상태가 성공한 삶의 모습이라 생각해요. 그리고 그런 행복을 주변과 나눌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죠. 사실 저는 골프를 치는 순간에 그런 만족감을 느껴요.(웃음)

성공의 감정까지 일깨운다고 하니, 골프가 삶의 많은 부분과 연결되어 있는 듯합니다.

예측할 수 없다는 점에서 골프는 인생과 닮아 있어요. 똑같은 자세와 각도로 스윙해도 매번 결과는 달라지죠. 형편없는 샷이 바람이나 지형 덕에 기적적으로 살아날 때도 있고요. 라운드를 돌다 보면 어느 순간 삶을 골프에 비춰보게 돼요. 골프가 제 일상과 감정, 생각의 많은 부분과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이유도 바로 그 지점 때문인 것 같아요.

에디터 유승현
포토그래퍼 박순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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