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와 설렘의 감각을
찾아 몰입합니다

A   PERSONA   59

그래픽 디자이너·모스그래픽 대표, 석윤이

Dec 18, 2025

석윤이는 무채색 중심이던 출판 시장에 다채로운 색과 그래픽을 적용하며 새로운 흐름을 구축한 디자이너다. 10여 년간 출판사 열린책들에서 약 1000여 권의 책을 디자인한 뒤 독립해 스튜디오 '모스그래픽'을 설립했다. 이후 책을 넘어 그래픽, 브랜딩으로 작업의 영역을 넓혔고, 자체 브랜드 ‘모스’를 통해 직접 개발한 패턴을 다양한 제품으로 구현하는 일까지 이어가고 있다. 20년간 탄탄히 제 길을 걸어온 그는 누구보다 ‘만드는 일 앞에서 솔직한 사람’이다. 스스로 잘하고 있는지를 끊임없이 확인하고, 감각이 흐려지는 순간에는 ‘내 감각이 왜 이렇게 무뎌졌지?’ 솔직하게 묻기도 한다. 일이 주는 슬픔과 기쁨의 파동 속에서도 그는 크게 흔들리지 않고 다시 작업을 이어간다.

모스 mohs와 모스그래픽 mohsgraphic을 설립하기 전까지 11년간 한 출판사를 다녔어요. 긴 시간 한 직장을 다닐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인가요?

본래 저는 자신감이 많지 않은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스스로 ‘잘하고 있다’는 감각이 들 때까지 묵묵히 버티는 타입이죠. 그 지점에 도달하기까지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고요. 돌이켜보면, 계속 배울 것이 있는 환경과 저를 믿고 일의 자율성을 가져다 준 리더의 신뢰가 가장 큰 원동력이었어요.

언제부터 스스로를 믿을 수 있었나요?

나이로 치면 서른쯤에서야 조금 편해졌고, 서른 중반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이건 내가 결정해서 만들어도 되겠다’라는 감각을 느낀 것 같아요. 그전까진 늘 ‘이게 맞나?’ ‘내가 잘하고 있나?’라는 불안이 따라다녔죠. 그런데 회사에서 거듭 기회를 주고, 그 선택을 신뢰해 주니까 조금씩 스스로를 믿을 수 있게 됐어요. 자율성이 주어지면 책임이 따라온다는 걸 그때 제대로 배웠고, 그 감각은 이후 독립해 일하면서도 큰 힘이 됐어요. 지금 제가 일을 대하는 태도의 뼈대 역시 다 그 시절 만들어진 거예요. 일을 대하는 태도, 책임감을 받아들이는 방식, 클라이언트와 대화하는 방법, 색을 고르고 종이를 보며 결과물을 상상하는 습관까지요.

독립 후 회사를 만들며 세운 원칙은요?

본래 저는 상업적인 것과 거리가 먼 사람이에요.(웃음) 아티스트는 아니지만 무언가에 한 번 꽂히면 수익과 상관없이 끝내 만들어야만 직성이 풀려요. 그래서 처음에는 목표가 하나였죠. 오로지 제가 만족할 만한 결과물을 만드는 것. 물론 지금은 조금 달라졌어요. 현실과 재미 사이의 균형을 고민하게 됐달까요?

재미를 일의 원동력으로 삼는다는 게 쉽지만은 않은 일이죠.

완전한 훈련이에요. 사실 일이 늘 재미있을 수는 없잖아요. 하지만 불평하는 건 제 손해라고 생각해서 어떻게든 그 안에서 재미를 찾으려고 해요. 특히 여러 사람과 협업할 때 그 태도가 더 중요하고요. 클라이언트와 일할 때도 마찬가지예요. 여기서 나오는 시안이든, 버려지는 그래픽이든 모두 제 자산이라고 생각해요. 결과와 상관없이 하고 싶은 거 다 해보는 이유죠. 실제로 그렇게 탈락한 시안이나 그래픽이 후에 저희 제품으로 나오기도 하고요.

“일이 늘 재미있을 수는 없잖아요. 하지만 불평하는 건 제 손해라고 생각해서 어떻게든 그 안에서 재미를 찾으려고 하죠.”

화사한 색의 북 커버가 모스그래픽, 석윤이 디자이너의 상징이기도 하죠. 주로 어디서 북 디자인의 영감을 얻나요? 

결과물이 나왔을 때의 느낌을 먼저 상상하는 편이에요. 이 책은 손에 들었을 때 작고 가벼워야 하는지, 아니면 조금 무겁고 차분해야 하는지 같은 물성을 먼저 떠올려요. 그런 감각이 있어야 종이나 여백, 원고 분량까지 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요즘은 “이 책이 누구의 책인가?”가 가장 중요해요. ‘이 작가는 이런 스타일을 좋아하겠지?’, ‘이 책은 이런 방향이 어울리겠다’ 같은 이미지를 머릿속에 먼저 띄우고, 거기서 폭을 좁혀가요. 시안은 최대한 넉넉히 만들어요. 선택지가 있어야 서로 명확하게 방향성을 찾을 수 있으니까요.

모스그래픽만의 디자인 원칙이 있을까요?

스스로 세운 건 없는데 외부에서 저희를 ‘높은 채도로 포인트를 준다’라고 평가하니까 역으로 원칙이 생긴 것만 같아요. 감각적인 컬러 베리에이션과 설명적이기보다 미니멀하면서도 임팩트 있는 디자인을 지향하죠. 단박에 시선을 잡아끄는 임팩트 말이에요.

반면 모스는 패턴을 기반으로 한 디자인이 특징이에요.

패턴을 개발하는 일은 늘 쉽지 않아요. 그래서 때로는 과제처럼 느껴지기도 하죠. 처음 모스를 만들고 패턴을 개발해 카드, 노트, 포장지 등을 내놓았는데, 그간 억눌러 왔던 욕구를 한꺼번에 터뜨린 기분이었어요. 모스를 통해 하고 싶은 것을 무모할 만큼 원 없이 해봤죠. 돈도 많이 썼고요.(웃음) 실패한 작업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일을 계속해야 하는 사람이구나’라는 확신이 들 만큼 행복했어요. 하지만 패턴 개발은 긴 호흡의 고민이 필요한 작업이에요. 뚜렷한 데드라인도 없다 보니 시간이 자꾸만 지체돼요. 여기에 클라이언트 작업, 브랜드 운영, 온라인 판매 등 팀 업무 범위가 자꾸 확장되면서, 감각을 꾸준히 유지하는 게 점점 어려워졌어요. 올해는 다른 일들에 밀려서 정작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작업을 소홀히 하게 됐죠. 그렇게 시간을 쓰다 보니 어느 순간, 제가 원래 갖고 있던 ‘감각’이 흐려지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예전에는 그래픽이 잘 나오면 너무 설레서 잠도 오지 않았는데, 올해는 그 설렘이 없어요. ‘내 감각이 왜 이렇게 무뎌졌지?’라는 생각이 들 만큼, 스스로에게도 충격적인 순간이에요.

디자인, 브랜드 트렌드가 빠르게 변하는 지금, 좋은 감각을 계속 견지하는 게 쉽지는 않죠.

한국은 모든 게 너무 빨라요. 새로운 것이 등장하면 곧바로 비슷한 것들이 쏟아지죠. 업계는 너무 좁고, 모두가 성실하며, 또 안목도 높아요. 그러다 보니 ‘누가 먼저 하느냐’를 두고 경쟁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질 때도 있어요. 그래서인지 다들 “재밌는 게 없다”라는 말을 쉽게 하는 것 같아요. 요즘은 인스타그램을 잘 안 봐요. 너무 많은 걸 들여다보는 게 오히려 피곤하더라고요. 꼭 필요한 트렌드만 살피고 나머지는 의도적으로 차단해요. 대신 회화든 설치든 장르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작품과 전시를 보면서 감각을 다시 채우죠. 그런 의미에서 뉴욕에 너무 가고 싶어요. 무언가에 큰 자극을 받아, 다시 설레고 싶다는 마음이 크거든요.

일과 삶 사이의 균형은 어떻게 찾나요?

아이가 크면서 부모의 역할이 훨씬 중요해졌어요. 그때부터 ‘내가 일에 너무 치우친 건 아닐까?’라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됐고요. 특히 올해는 가벼운 번아웃을 겪으면서 한동안 평정심을 잃은 순간들도 있었어요. 며칠 동안 괴로워했는데 어느 순간 마음속에서 “이럴 시간이 없어. 인생은 너무 짧아. 지금 기회가 오고 있는데 뭐 하는 거야?”라는 말이 들리더라고요. 덕분에 중심이 딱 잡혔어요. 부모님도 빨리 늙고, 아이도 빠르게 자라니까 지금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겠더라고요. 그래서 이젠 일만 우선순위에 두지 않고 살림도, 아이와의 시간도 일처럼 중요하게 여기려 해요. 일이 더 하고 싶을 때도 ‘이 정도면 됐어. 나 정말 열심히 했어’라고 스스로를 다잡아요. 모두 건강하고 행복한 지금이야말로, 놓치지 말아야 할 순간이라고 생각해요.

에디터 유승현
포토그래퍼 맹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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